복학을 앞둔 한양대 학생 김모씨(24)는 최근 '셋방살이'의 설움을 실감했다.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70만원짜리 원룸을 보고 부모님께 연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개업자로부터 방이 나갔다는 전화가 왔다. 중국인 유학생이 보증금을 400만원으로 낮추는 대신 월세를 80만원 주기로 해 계약했다는 통보였다. 김씨는 "겨우 찾은 방을 눈앞에서 놓치니 허탈했다"며 "요즘 대학가는 방을 고르는 게 아니라 쫓기듯 결정해야 하는 전쟁터"라고 토로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 인근 원룸에서 한 대학생이 양손을 뻗으면 벽이 닿을 만큼 작은 월세방을 살펴보고 있다. 집주인은 “현재 남은 방은 이곳 하나뿐”이라고 설명했다. 박호수 기자
외국인 유학생이 급증하면서 서울 대학가 임대차 시장에서 이른바 '원룸플레이션(원룸+인플레이션)'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자금 여력이 있는 유학생들이 시세보다 높은 월세를 제시하며 방을 선점하는 사례가 늘자, 주거비 부담에 취약한 국내 대학생들이 외곽으로 밀려나는 '주거 젠트리피케이션' 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4일 한국교육개발원(KEDI)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기준 국내 외국인 유학생은 25만3434명으로, 전년 대비 4만4000명가량 늘었다. 이 가운데 중국 국적 유학생은 7만6541명으로 30.2%로 가장 많았다. 특히 한양대·경희대에선 중국 학생들이 각 5000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대역 인근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에 월세 가격 안내판이 게시돼 있다. 외국인 유학생 수요 증가와 전세 실종 여파로 서울 대학가에서 고월세 현상이 확산하고 있다. 박호수 기자
업계는 유학생의 계약 방식이 가격 상승을 부추기는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보증금을 '나중에 돌려받는 자산'이 아닌 '소비 비용'으로 인식하다 보니, 보증금을 낮추고 월세를 높이는 방식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서울 동대문구의 한 공인중개사 곽모씨(52)는 "일부 유학생은 신축 오피스텔에서 시세와 관계없이 월세를 150만원까지 제시하는 이른바 '월세 쇼핑'을 한다"며 "이런 거래가 상단 가격을 형성해 주변 시세까지 끌어올린다"고 설명했다.
중국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불법 브로커의 개입이 시장 왜곡을 키운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자격이 없는 브로커들이 중국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샤오훙슈 등을 통해 유학생을 모집한 뒤 입국 전 사진만 보고 '선계약'을 주도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경희대 인근의 한 공인중개사 박모씨(66)는 "학기 전 석 달 장사가 1년 매출을 좌우하다 보니 경쟁이 치열하다"며 "브로커 수수료를 맞추다 보면 집주인과 상의해 월세를 더 올리게 된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임대인들의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성동구에서 원룸 13가구를 운영하는 정모씨(72)는 이 가운데 8가구를 중국 국적 학생과 계약했다. 정씨는 "이미 건물주들 사이에선 '월세 수입 면에서 한국 학생보다 외국인 유학생이 유리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고 전했다.
고물가에 따른 식비 상승과 등록금 인상 압박이 겹친 대학생들은 '주거 하향'에 직면한다. 경희대 재학생 박모씨(22)는 "월세와 관리비, 교통비를 합치면 숨만 쉬어도 월 120만원이 나간다"며 "학교에서 먼 지역이나 비좁은 원룸텔로 주거 수준을 낮춰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부동산 플랫폼 '다방'에 따르면 서울 주요 대학가 10곳의 평균 주거비(월세+관리비)는 2019년 10월 55만5000원에서 지난해 10월 67만2000원으로 21.1% 상승했다. 이화여대 인근이 79만4000원으로 가장 높았고 경희대 73만4000원, 성균관대 70만4000원 등이 뒤를 이었다. 월세 80만원에 관리비를 더하면 실제 부담은 100만원에 육박한다.
전문가들은 이번 현상이 전세사기 여파로 인한 월세 선호와 유학생 수요가 맞물린 결과라고 분석한다. 김제경 투미부동산컨설팅 소장은 "전세가 낯선 외국인에게 고월세는 합리적인 선택"이라며 "대학생·사회초년생까지 월세 시장에 몰린 상황에서 유학생발 고월세가 가격 상단을 고착화하면 국내 학생들의 주거 여건은 악화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