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제약·바이오 시장의 시계바늘이 새해 벽두부터 '리보핵산(RNA) 치료제'를 향해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지난 수년간 글로벌 제약업계를 강타했던 비만·당뇨 치료제 열풍으로 막대한 현금 실탄을 확보한 빅파마들이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RNA 치료제를 지목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해부터 글로벌 빅파마들이 조 단위의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으며 기술 확보에 열을 올린 가운데, 올해는 그 결과물인 주요 임상 데이터들이 대거 공개될 예정이어서 관심이 높아진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어진 빅파마들의 공격적인 M&A(기업 인수합병)와 기술이전 계약은 RNA 치료제가 주류 시장으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진다. 노바티스는 지난해 10월, 근육 조직으로의 RNA 전달 기술을 보유한 애비디티 바이오사이언스를 약 120억달러(약 17조2260억원)에 인수하는 '메가 딜'을 터뜨렸다. 현재 마무리 단계인 이 인수가 1분기 중 완료되면 노바티스는 후기 단계의 RNA 파이프라인을 단숨에 확보하게 된다.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퀴브(BMS) 역시 지난해 10월 RNA 기반 치료제 기업 오비탈 테라퓨틱스를 15억달러(약 2조1532억원)에 인수하며 전장에 합류했다.
빅파마들이 이처럼 RNA에 열을 올리는 건 기존 약물의 한계점 때문이다. 기존 항체나 화합물 치료제는 이미 생성된 질병 단백질을 사후에 차단하는 방식이라 투약 중단 시 증상이 재발하거나, 구조적으로 공략이 힘든 단백질이 많다는 약점이 있었다. 반면 RNA 치료제는 단백질 제조 설계도인 mRNA(메신저 리보핵산) 단계에서 작용해 원인 단백질의 생성 자체를 원천 봉쇄하거나 수정한다.
구체적으로 siRNA(짧은 간섭 RNA)는 질병 유발 mRNA를 직접 분해하고 ASO(안티센스 올리고뉴클레오타이드)는 mRNA 결합을 통해 분해를 촉진하거나 유전자 가공 과정을 바꾼다. 반대로 단백질이 부족할 경우 정상 mRNA를 주입해 생성을 유도하거나, mRNA 염기서열을 직접 고치는 'RNA 편집' 기술도 상용화 단계에 와 있다.
이 거대한 흐름의 중심에 한국 기업들이 서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비만치료제 '마운자로'로 글로벌 바이오 기업 시가총액 세계 1위에 오른 일라이 릴리는 지난해 K-바이오의 기술력에 약 3조원에 달하는 투자를 감행했다. 릴리는 지난해 2월 올릭스 와 9100억원 규모의 기술이전 계약을 맺고 대사이상지방간염(MASH) 치료제 후보물질 'OLX702A'를 확보했다. 올릭스의 독자적인 RNA 간섭 플랫폼이 가진 국소 투여의 장점과 확장성을 인정한 결과다. 이어 5월에는 알지노믹스 와 최대 1조9000억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 알지노믹스의 'RNA 치환 효소' 플랫폼을 활용한 유전자 편집 치료제 공동 개발에 나섰다.
제조 인프라 분야에서는 에스티팜 이 글로벌 강자로 입지를 굳혔다. RNA 치료제의 핵심 원료인 올리고뉴클레오타이드 CDMO(위탁개발생산) 분야에서 원료 합성부터 대량 생산까지 전 공정을 내재화하며 늘어나는 글로벌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올해는 이들 기술의 '성적표'가 나오는 해다. 알지노믹스는 간세포암 대상 임상 결과를 통해 RNA 치환 효소 기술의 인체 효능을 세계 최초로 검증할 예정이다. 올릭스 역시 릴리에 이전된 MASH 파이프라인의 임상 진전을 통해 플랫폼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업계 전문가는 "올해는 글로벌 빅파마의 RNA 치료제가 희귀질환을 넘어 심혈관·대사·중추신경계 질환에서도 통할 수 있을지 판가름 나는 원년이 될 것"이라며 "국내 기업들 역시 단순한 기술 수출을 넘어 실제 환자 데이터로 경쟁력을 입증한다면 기업 가치의 퀀텀 점프(대도약)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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