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중 관세 조치 이후 중국산 수출 물량이 아세안·인도·남미 등 제3국으로 이동하면서 각국이 이를 산업정책·공급망 정책과 결합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 보호무역이 관세·세이프가드 중심의 시장 방어 조치였다면, 최근에는 보조금·조달·표준·원산지·FDI(외국인직접투자)·데이터 등 정책 수단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세계무역기구(WTO) 분쟁 해결 기능이 사실상 중단된 가운데 통상 규범보다 산업정책이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체계 변화가 뚜렷해지고 있다.
22일 한국무역협회가 발간한 '보호무역의 시대, 미국발 규제의 글로벌 확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기준 중국의 대미 수출은 전년 대비 18.9% 감소했지만 같은 기간 미국을 제외한 지역으로의 수출은 9.6% 증가했다. 특히 아세안(13.7%), 인도(11.9%), 라틴아메리카(7.1%) 등에서 증가세가 컸다. 미국 관세로 차단된 중국산 물량이 제3국으로 이동하는 '무역전환' 현상이 수출 통계에서 확인된 셈이다.
이후 수입 압력이 커진 지역에서는 보호조치가 연쇄 도입됐다. 유럽연합(EU)은 철강 분야에서 무관세 쿼터를 축소하고 초과분에는 50% 관세를 부과하는 TRQ(저율관세할당) 제도를 도입했으며, 생산 공정을 검증하는 조강 기준 규정도 추가했다. 캐나다와 인도는 각각 쿼터 및 잠정 세이프가드 조치를 시행했고 남아공은 양허관세율 조정 방안을 검토중이다.
정책의 목표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보호무역이 값싼 수입품 유입을 막는 '시장 방어' 성격이 강했다면, 이제는 자국 안으로 공장과 투자를 끌어오는 '공급망 유치'와 '전략산업 육성'이 핵심 목적이 되고 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법(CHIPS Act), EU의 넷제로 산업법(Net Zero Industry Act)과 핵심원자재법(Critical Raw Materials Act)은 보조금과 공공조달, 세제, 환경 규제를 한 묶음으로 설계해, 자국 내 생산과 투자에 인센티브를 주는 전형적인 산업정책형 통상수단이다.
일본과 인도도 반도체·배터리 분야에서 유사한 정책 조합을 도입하며 특정 품목의 국내 생산 비중을 높이려 하고 있다. 통상정책이 무역을 넘어 산업, 공급망, 기술 정책과 맞물려 움직이는 체계가 빠르게 자리잡는 모습이다.
한국 반도체 업계는 미국의 반도체 관세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와 함께 관세 조건에 대한 한미 협상을 추진 중이다. 청와대와 통상 당국은 한국 반도체가 주요 경쟁국 대비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확보하기 위해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최근 "미국 내 생산이 없으면 최대 100% 관세 부과" 가능성을 공식 언급하며 투자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런 발언은 한국의 주요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겨냥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두 회사는 텍사스·인디애나 등 미국 내 생산·패키징 시설 투자를 추진하고 있어, 글로벌 통상 환경 변화와 함께 투자 전략과 생산 전략이 동시에 검토되는 상황이다.
미국 정책 당국이 관세 감면 및 조달·보조금·인허가 조건을 투자와 연계하는 방식을 택하면서, 기업은 생산·입지·투자 결정을 통상 요인과 함께 고려하는 구조가 재형성됐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미국 정부는 한편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에 투입되는 반도체 장비에 대해 연간 허가제를 검토하고 있어, 정책 변화가 글로벌 운영 유연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자동차 산업에서도 조정이 나타났다. 미국 관세 부담이 늘어나자 현대차는 일부 인기 SUV 모델의 미국 생산 비중을 높이고 현지 부품 조달 비중 확대 전략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세·조달 규정·보조금·현지 생산 요구가 겹치면서 생산 거점이 과거의 저임금·원가 중심에서 조달 접근성과 정책 친화성 등을 포함한 다층 기준으로 재편되는 움직임이다. 미국의 전기차 조달 규정, 배터리 원산지 기준, IRA 보조금 조건 등이 결합되면서 자동차 기업은 규제 비용을 포괄적으로 고려하는 공급망 설계를 요구받고 있다.
이처럼 글로벌 보호조치 확산이 수출 기업의 생산 입지, 공급망 구성, 원산지 관리, FTA 활용, 보조금·조달시장 참여, FDI 전략 등과 연계되면서 통상·산업 정책 간 조정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은 EU·영국·캐나다 등과 FTA 체결을 통해 일부 시장에서 제도적 완충장치를 확보하고 있으나 멕시코와 인도, 브라질 등 FTA 공백 지역에서는 보호조치 대응 여력이 낮다는 지적도 있다.
이유진 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보고서에서 "2025년 통상환경의 최대 과제가 관세였다면, 2026년에는 관세의 영향을 받은 제3국의 보호주의가 우리 수출 기업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며 "규제 확산 국면에서도 FTA의 전략적 유효성은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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