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자국 기술 공급망에 기여하지 않는 일부 고성능 반도체에 25% 관세를 부과하기로 하면서 국내 반도체 업계가 영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번 조치는 미국 내 수요가 아닌 재수출용 AI 칩을 우선 타깃에 둔다는 점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 데이터센터에 공급하는 메모리 중심 물량은 당장은 관세 적용에서 비켜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이번 조치가 장기적으로 미국의 반도체 산업 전략, 동맹 중심 공급망 재편, 국가별 투자 압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시장의 관심은 단기 영향보다는 그 이후로 향하고 있다.
16일 업계에선 이번 관세가 생산지보다 사용처와 경로를 기준으로 적용되는 점에서 전통적 관세와 성격이 다르다고 보고 있다. 실제 백악관 팩트시트를 종합하면, 미국 상무부는 일정 연산 성능과 메모리 대역폭 기준을 충족하는 고성능 AI 칩 가운데 미국 내 데이터센터 및 연구 목적이 아닌 재수출용 물량에 우선 관세를 부과하도록 설계했다. 대만에서 생산된 엔비디아 H200과 AMD MI325X가 미국을 경유해 중국으로 재수출되는 루트가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다. 미국 내에서 소화되는 물량은 예외로 두고 상무장관이 미국 공급망에 기여한다고 판단할 경우 추가 예외도 허용할 수 있도록 했다.
국내 업계에서 단기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납품하는 HBM과 서버용 DRAM은 대부분 미국 클라우드 기업의 데이터센터에서 직접 사용되며 재수출 루트와 거리가 있다. 관세 부담도 엔비디아와 AMD가 질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그 이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포고문에서 향후 반도체와 파생 제품 전반으로 관세를 확대하기 위해 국가별 협상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상무부에 90일 내 협상 진척 상황을 보고하라고 지시했고 미국 내 투자 기업에는 관세 상쇄 혜택을 줄 수 있다는 문구도 포함됐다. 지난해 미국이 TSMC에게 애리조나 공장 투자 확대를 요구하는 과정에서도 관세 인하를 연계했던 사례가 있다. 관세와 투자, 공급망과 조달, 안보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는 미국식 접근이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이번 조치가 국내 기업에 부담만 주는 것은 아니다. AI 반도체의 성능과 전력 효율을 결정하는 요소는 이제 GPU에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서버 시스템의 병목이 GPU와 연결된 HBM과 패키징에서 발생하면서 전체 시스템 구성 가치가 바뀌고 있다. 관세가 GPU 기반 AI 칩 조달 비용을 높이면 클라우드 사업자 입장에서는 동일한 성능을 더 효율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선택지를 찾을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한국 기업이 강점을 갖는 HBM과 패키징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 높아질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관세는 가격 신호이기 때문에 GPU 가격이 올라가면 고객사들은 시스템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다른 요소를 찾게 된다"며 "이 경우 HBM과 패키징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돼 한국 기업의 전략적 가치가 오히려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GPU 가격이 오르면 관세가 없는 제품을 찾는 움직임이 생길 수 있다"며 "25%만으로 가격 역전이 일어나진 않겠지만 규제가 장기화되면 대체재 수요가 생기고 국산 AI 반도체 개발 기회도 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 변수도 작지 않다. 이번 조치는 중국의 AI 데이터센터 수요를 사실상 겨냥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자체 GPU 개발을 시도하고 있으나 성능과 생태계 측면에서 격차가 크고 HBM과 패키징에서는 더욱 불리하다. 규제가 강화될 경우 중국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라도 쓸 수 있는 고급 메모리와 장비를 확보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 유럽의 소부장 공급망 의존도가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리 정부는 이번 사안을 통상 이슈가 아닌 산업·안보 이슈로 보고 대응하는 모습이다. 산업통상부는 반도체 업계와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포고문 내용을 분석했고 통상교섭본부는 미국 측과 추가 접촉을 이어가고 있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도 미국의 반도체·핵심광물 232조 조사 이후 정부 의견서 제출 등 대응 활동을 점검하고 업계와의 소통을 통해 영향을 분석하며 피해 최소화에 총력 대응하라고 지시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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