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한국이 자체 설계한 인공지능(AI) 전용 슈퍼컴퓨터(슈퍼컴)는 실현 가능한가. 이 질문은 기술적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국가 정책 선택의 문제다. 일본과 대만은 이미 추진 했거나 추진하고 있다. 한국만 아직 시작하지 못했다.
일본은 슈퍼컴을 국가 과학 인프라로 규정했다. 일본이 자랑하는 슈퍼컴 후가쿠(Fugaku)는 최고의 성능을 갖추는 것보다 일본이 컴퓨팅 아키텍처를 스스로 설계·운영·개선하는 능력을 축적하는 목적에서 고안됐다. 결과적으로 이런 시도가 후가쿠 슈퍼컴을 세계 최고 성능 반열에 올려놓았다.
대만은 다른 길을 택했다. 설계 주권을 고집하기보다, 글로벌 AI 시스템을 가장 잘 제조·통합하는 국가가 되는 전략이다. 대만은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 중심 생태계에서도 패키징, 전력 효율, 시스템 통합에서 대체 불가능한 위치를 확보했다. 현재 대만은 GPU 1만장을 토대 삼아, 세계 최고의 AI 제조 국가라는 목표 아래, AI 팩토리에 활용하기 위해 엔비디아와 AI 슈퍼컴을 제작중이며 예정대로 진행되면 올해 가동에 들어간다.
한국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포함한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AI 슈퍼컴에서 메모리는 보조 부품이 아니라 성능과 전력 효율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럼에도 한국은 이 강점을 시스템 설계로 연결하지 못했다. 이는 기술 부족이 아니라 정책 부재의 결과다.
한국의 산업 정책은 부품 단위의 경쟁력 강화에는 성공했지만, HBM - 신경망처리장치(NPU) - 시스템 - 소프트웨어를 하나의 설계 문제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한국이 AI 3대 강국이 되기 위해선 '한국형 AI 슈퍼컴'을 제작해야 한다. 슈퍼컴을 자체 설계해본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는 산업 파급효과 측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정부는 국가 전략 산업을 위한 목적 특화형 AI 슈퍼컴을 국가 과제로 채택해야 한다. 연산 중심이 아닌 메모리·데이터 이동 최적화 아키텍처로 거대언어모델(LLM) 학습, 제조·공정 AI, 국방·에너지 시뮬레이션 등에 특화된 AI 슈퍼컴이 있어야 한다. 이는 한국이 보유한 HBM 경쟁력을 가장 직접적으로 시스템 주권으로 전환하는 경로다. 또한 이제 막 꽃봉오리가 맺히고 있는 퓨리오사 AI 등 토종 팹리스 NPU 업체들의 글로벌화 레퍼런스를 만들어 주는 좋은 기회다.
AI 슈퍼컴은 단일 기업의 프로젝트가 아니다. 정부 주도로 상설 설계 컨소시엄을 구성해야 한다. 참여 주체는 메모리·팹리스·시스템 기업, 출연연·대학. 컴파일러·AI 프레임워크 연구진 등으로 구성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는 단기 실적 평가 체계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10년 단위 장기 국가 인프라 과제로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HBM - NPU - AI 슈퍼컴 연계 전략을 국가 프로젝트로 묶는 것이다. 이 지점이 한국만의 결정적 차별화 포인트다. 한국은 HBM과 차세대 NPU를 동시에 보유·육성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다. 이렇게 해야 한국은 단순한 '부품 공급국'을 넘어, 'AI 컴퓨팅 구조를 설계하는 국가'로 도약할 수 있다.
여기서 '실패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예산 구조'를 설계하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하다. AI 슈퍼컴 설계는 실패를 동반할 수 있다. 문제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제도다. 감사 기준을 '결과' 로만 규정하는 스킴도 바꿔야 한다. 이런 제도 변경 없이는 '국산 슈퍼컴' 탄생이 쉽지 않다. 한국이 설계한 AI 전용 슈퍼컴이 지금껏 탄생하지 못한 이유는 어려운 기술 때문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제도와 인식, 그리고 기술의 연결과 결단의 문제다.
일본은 설계를, 대만은 최적화를 선택했다. 한국은 이제 HBM - NPU - 시스템을 묶는 설계 국가로 갈 것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세계 최고 부품을 공급하는 나라로 남을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AI 슈퍼컴은 계산기가 아니다. 그것은 AI 시대 국가 산업 구조를 결정하는 설계도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이러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가 이러한 장기 어젠다 세팅을 해야한다. 국가인공지능전략 위원회는 더 큰그림으로 AI 산업 전체를 끌고 가는 플래그십이 돼 이재명 정부의 상징적 어젠다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일본 효고현 고베시의 국립 이화학연구소 계산과학연구센터가 보유하고 있는 슈퍼컴퓨터 '후가쿠'.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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