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6일 넷플릭스의 한국 상륙은 콘텐츠 산업의 질서를 근본부터 흔든 사건이었다. 단순히 경쟁을 촉발하는 '메기 효과'를 넘어, 제작·유통·수익 구조 전반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10년이 지난 지금 K콘텐츠는 전 세계가 열광하는 주류로 자리 잡았지만, 화려한 성과 이면에는 수익성 악화와 생태계 불균형이라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과연 '글로벌 콘텐츠 강국'이 된 것일까, 아니면 가성비 좋은 '고급 하청 기지'로 전락한 것일까.
'오징어 게임 시즌2' 월드 프리미어 이벤트 현장
11일 콘텐츠 업계와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K콘텐츠 산업은 글로벌 흥행을 통해 매출 규모는 급성장했지만, 제작사에 귀속되는 실질 수익은 오히려 줄어드는 구조적 한계에 직면해 있다.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중심으로 재편된 제작·유통 구조 속에서 국내 제작사들은 콘텐츠를 제작해 공급하는 역할에 머무르며, 지식재산권(IP)을 플랫폼에 넘기는 계약 방식을 지속해 왔다. 이 과정에서 제작비는 급등했지만, 흥행 이후 발생하는 2차·3차 수익은 대부분 플랫폼에 귀속되면서 "1조원을 벌어도 남는 것은 없다"는 평가가 업계 전반에서 나온다.
수익의 비대칭성은 가장 뼈아픈 대목이다. 넷플릭스는 제작비를 100% 부담하고 제작사에 3~10% 수준의 마진을 보장한다. 대신 작품의 모든 IP를 독점한다. 흥행 실패의 위험을 플랫폼이 떠안는 구조는 초기에는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안정적인 제작 환경과 글로벌 유통망은 국내 제작사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과 같은 초대형 히트작이 등장하면서 이 계약 구조의 한계가 분명해졌다.
업계에서는 오징어 게임이 1조원 이상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 것으로 추산하지만, 제작사 싸이런픽쳐스가 거둔 수익은 제작비와 소정의 관리비 수준에 머물렀다. 시즌이 이어지고 테마파크와 각종 파생 사업이 확장돼도 추가 수익은 플랫폼에 귀속된다. '더 글로리'도 사정은 같다. 비영어권 TV 부문 글로벌 1위를 기록하며 폭발적 화제성을 모았지만, 정작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의 주가는 방영 직후 오히려 하락했다. 넷플릭스가 IP를 독점하면서 글로벌 흥행에 따른 판권 수익이나 2차 저작물 매출이 장부에 반영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상파 방송사도 예외는 아니다. MBC가 제작한 예능 '피지컬: 100'은 한국 예능 최초로 전 세계 시청 시간 1위를 기록했으나, 정작 MBC는 '속 빈 강정' 신세를 면치 못했다. 과거라면 직접 IP를 보유한 채 포맷 수출 등으로 막대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거대 방송사조차 넷플릭스의 '고급 외주사'로 전락한 실정을 보여준다. 제작비 리스크를 피한다는 명분 아래 미래 먹거리인 '황금알'을 통째로 넘기는 관행이 굳어진 셈이다. 겉보기의 화려한 글로벌 성공이 국내 콘텐츠 산업의 기초 체력과 무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넷플릭스 '더 글로리' 스틸컷
이러한 수익 구조 속에서 불거진 제작비 초인플레이션은 토종 콘텐츠 생태계를 위협하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 제작비 상승을 넷플릭스나 배우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표준계약서 정착 등 제작 현장의 처우 개선이 반영된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문제는 높아진 제작비 기준을 감당할 수 있는 주체가 사실상 글로벌 빅테크 자본으로 한정된다는 점이다.
자금력이 취약한 국내 방송사와 토종 OTT는 고품질 드라마 제작을 축소하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그 결과 시장은 글로벌 플랫폼 중심으로 재편되고, 중소 제작사와 신인 창작자들은 선택받지 못하면 도태되는 구조에 놓였다. "거대 자본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냉혹한 논리가 산업 전반에 확산되며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문화적 다양성의 훼손도 우려된다. 전 세계 동시 공개와 '몰아보기'를 전제로 설계된 플랫폼 알고리즘은 스릴러·크리처·디스토피아 등 자극적인 장르로 제작을 편중시키는 경향이 뚜렷하다. 한국 드라마의 오랜 강점인 멜로·휴먼 드라마, 실험적 저예산 작품은 '글로벌 흥행 코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획 단계에서 배제되기 일쑤다. 이는 K콘텐츠의 저변을 약화시키고 소재와 형식의 획일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10년이 K콘텐츠의 '가능성'을 증명한 시기였다면, 앞으로의 10년은 '실리'와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싸움이 될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단순 납품형 계약에서 벗어나 제작사가 IP를 공유하거나 러닝 개런티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계약 구조를 선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흥행 성과가 제작사와 창작자에게도 합리적으로 환원돼야 산업이 선순환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조영신 동국대 미디어연구소 대우교수는 "한국 콘텐츠 시장은 과열의 후유증으로 당분간 '눈물의 기간'을 버텨야 하는 혹독한 조정기에 진입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앞으로 시장은 넷플릭스가 주도하는 초대형 텐트폴 작품과 사전 기획을 통한 효율 중심의 중·저예산 작품으로 양분될 것"이라며 "단순히 제작비 탓만 할 일이 아니라 느슨한 제작 관행을 바로잡아 기초 체력을 키워야만 글로벌 플랫폼의 하청 기지를 넘어 자생 가능한 생태계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피지컬: 100' 포스터
정부 역할론도 커지고 있다. 토종 플랫폼을 육성해 글로벌 플랫폼의 독점을 견제하고 다양한 장르가 공존할 수 있도록 정책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는 요구가 잇따른다. 넷플릭스가 깔아놓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데만 몰두하다 산업의 주도권인 '운전대'까지 넘겨주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경고다.
김지희 문화체육관광부 영상방송콘텐츠산업과장은 "국내 제작사가 단순히 제작비와 일정 마진만 챙기고 모든 권리를 넘기는 하청 구조에서 벗어나도록, 플랫폼과 IP를 공동 보유해 추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OTT 특화 제작 지원' 사업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글로벌 플랫폼의 사업 방식을 강제할 수 없는 만큼, 제작사가 IP 주권을 쥔 채 다양한 유통망을 활용하는 '대안적 성공 모델'을 만들 수 있도록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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