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안보전략의 또 다른 축은 '경제안보'다. 중국을 배제하는 무역질서 재편을 핵심 의제로 내세우며 한국의 부담을 키울 거란 분석이 나온다. 미국이 무역관계 리밸런싱과 관세를 통한 재산업화를 내걸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동맹들의 정책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중 갈등의 여파가 한국에 전가되지 않도록 산업·기술 공급망 구조를 구분해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공개한 미 행정부 최고위 전략 문서인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중국을 단순 경쟁국이 아닌 '글로벌 무역질서를 왜곡하는 구조적 위험'으로 규정했다. 이와 함께 무역적자 축소, 핵심 공급망 외부 의존 차단 등을 패키지로 묶었다. '무역관계 재조정'을 경제안보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전략 문서보다 강경해졌다는 평가다.
미 행정부는 보고서에 "무역관계 재조정을 우선하며 무역적자를 축소하고 덤핑·불공정 관행을 종식하겠다"며 "핵심광물·핵심자재·부품 및 완제품까지 공급망을 의존하지 않기 위해 약탈적 경제 관행을 견제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리쇼어링(국내 복귀)을 추진하고 관세·신기술 등을 활용한 재산업화를 병행한다는 방침이다. 특정 산업이 언급되진 않았으나 반도체·배터리 등 첨단산업이 핵심 공급망으로 분류되는 만큼 한국 산업계에 영향이 직결될 것으로 보인다.
NSS 보고서는 미국·동맹 간 공급망 협력 확대를 전제로, 중국에 대한 무역 리밸런싱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과의 교역을 줄이고 미국·동맹 중심 공급망으로 재편하란 메시지다. '중국에 해온 만큼 미국에도 투자하라'라는 압박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 같은 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해 '경제블록화' 구상까지 제시했다. 보고서는 미국의 경제 규모가 30조달러, 우방국의 경제력이 35조달러에 달한다며 이를 합산하면 세계 경제의 절반에 이른다고 언급했다. "한국·일본·유럽·호주·캐나다·멕시코 등이 '연합 경제력'으로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동맹국 경제가 어떤 경쟁 세력에도 종속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명분을 제시했지만 "(한국 등이) 중국 경제를 '내수 중심'으로 재조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무역정책을 채택하도록 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사실상 미국의 설계대로 공급망 구조를 바꾸라는 명시적 압박으로 풀이된다.
이는 중국의 '근린 궁핍화'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의도와 무관하게 중국 산업계를 부흥하기 위한 보조금 등 정책이 이웃 국가의 산업을 희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반도체·배터리·전장 등 중국의 미국 진출이 구조적으로 제한된 산업에서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미국과 정책 보조를 맞춰야 하는 유럽 등 시장에서도 한국산이 대안으로 꼽힌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과거에는 중국이 성장할 때 세계 경제가 함께 성장했지만 이젠 전 세계에 마이너스 영향을 미친다"며 "더구나 희토류 등 공급망을 갖고 있어 미국의 위기감이 더 크다"고 진단했다. 이어 "한국과 중국도 보완관계에서 경쟁관계로 바뀐 만큼 대중 수출 감소보다 다른 시장에서 경쟁이 완화되는 효과에 주목한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0월 부산 김해공군기지 의전실 나래마루에서 미·중 정상회담을 마친 뒤 회담장을 나서며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중국산 배제에 따른 시장 공백이 곧바로 한국 기업들의 수출 확대로 이어지긴 어려워 보인다. 현지 투자·공급망 투명성 확보 등 추가적인 정책 요구가 뒤따를 수 있어서다. 미국의 대중 견제 아래 깔린 자국 우선주의 정책이 기업 부담을 키울 거란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미국이 중국에 대한 디커플링(탈동조화)을 요구하면서 지금과 같은 관세 정책을 펼치는 건 이율배반적인 태도"라고 질타했다. 그는 "중국은 이미 전 세계 시장에 공급망을 갖췄고 미국마저도 완전한 탈중국이 어렵다"며 "동맹들이 똘똘 뭉쳐도 중국의 부상을 막기 어려운 만큼 대중 의존도를 낮출 수 있도록 지원책이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이중성이 공급망 안정 논리와도 충돌한다고 봤다. 이 위원은 "과거에는 가격·품질·효율로 경쟁했다면 지금은 공급망 복수 구축과 정책 리스크까지 고려해야 하는 고차방정식이 됐다"며 "한국 기업들은 미국의 방침으로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미국은 최근 '팍스 실리카' 서밋을 열고 인공지능(AI)·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경제동맹을 출범했다. 한국·일본·싱가포르·네덜란드·영국·이스라엘·아랍에미리트(UAE)·호주 등 8개국이 핵심광물·에너지·반도체·AI 기반시설 등 측면에서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정부로선 중국에 대한 수출통제 등을 요구할 경우 부담이 커질 수 있어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미국의 대중 견제 구상이 본격화할수록 한국의 선택지는 좁아지고 정교해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동맹으로서 '경제블록' 참여를 요구받는 동시에 미국 우선주의 부담까지 떠안는 구조에서 산업별 이해관계를 고려한 세밀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과의 교류를 단절하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해 균형점을 찾는 게 우선 과제로 꼽힌다.
정인교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조만간 미국은 수출국에 중간재 점검 의무를 부과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원산지 기준도 탈중국 증명서로 대체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미국의 기조에 전면 동조하기보단 공급망 다변화, 동맹 연계로 대응해야 한다"며 "공급망 재편에 참여하되, 디리스킹(위험 분산)을 고려해 중국과의 교류를 지속하는 균형을 견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부 차원에서 디리스킹을 염두에 둔 균형 전략을 모색하더라도 실제 부담은 기업 현장에서 먼저 체감될 수밖에 없다. 미·중 간 규제와 통상 질서가 산업별로 상이하게 전개되는 만큼 기업들은 사업 구조를 어떻게 분리·운영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이 요구되고 있다.
김민아 딜로이트 컨설팅팀장은 "그동안 한국 기업들이 유지해온 전략적 유연성은 미·중 간의 안보·기술 경쟁 심화로 지속 가능성이 작아지고 있다"며 "이 같은 환경에서 리스크를 관리하고 기회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미·대중 사업을 어느 수준까지 분리·운영할 수 있는지 현실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러면서 "특정 국가의 편을 선택하란 뜻이 아니라 산업·기술별로 상이한 규제·공급망 구조를 명확히 구분해 대응 범위를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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