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 불법유통 몸으로 막던 서예가, 서민금융 버팀목 되다[만보정담]

김윤식 신협중앙회장 인터뷰
대구농수산물시장 '불법도매' 사건 이후
도매법인 대표 올라
동네 신협 어려움 외면 못해 회장까지
"경영정상화 이행약정 조기해제 등 뿌듯"
수신 규제 완화 아쉬워
신임 회장에 "건전성 관리·서민금융 본연의 역할 당부"

지난 3일 대전 신협중앙회 본부 회장실. 김윤식 신협중앙회장의 책상에는 문방사우가 있다. 최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선물해 화제가 된 만큼 서예가 취미인지 물었다. 그의 이력을 떠올리면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처음 접했는데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20대 후반 모친께서 편찮으셨을 때다"며 김 회장은 당시를 떠올렸다. 집에서 병시중을 들던 그는 모친이 부르면 곧바로 찾아갈 수 있고 차분함을 기를 수 있는 취미로 서예를 선택했다. 취미는 곧 직업이 되었고, 1997년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 서예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국전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처럼 서예가로서 탄탄대로를 걷던 그가 신협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김윤식 회장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직접 해결에 나서며 도매법인부터 신협까지 다양한 변화를 이끌었다. 그는 회장 재임 기간을 돌아보며 소회를 밝히는 한편, 다음 달 선출될 후임 회장에게도 신협의 정체성인 '서민금융'을 당부했다.


김윤식 신협중앙회장이 대전 신협중앙회 본사 주변을 산책하고 있다. 조용준 기자

김윤식 신협중앙회장이 대전 신협중앙회 본사 주변을 산책하고 있다. 조용준 기자


농산물 불법유통 막기 위해 트럭 앞에 누워…"동네 신협 어려움도 외면 못 해"

김 회장이 국전에서 상을 받은 시기 대구 북구에 있는 대구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는 불법유통이 성행하고 있었다. 일부 중도매인(경매를 통해 소매상에 중개하는 사람)들이 경매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농산물을 직거래하거나, 경매장부에 실거래가보다 낮게 기록해 수수료와 세금을 탈루한 것이다. 이 사건 관련한 중도매인들이 구속되고 처벌받는 일이 벌어지자 대구시에서는 도매법인들에 대주주가 직접 경영할 것을 권고했다. 중도매인이 시장 질서를 어기면 '경매질서 유지' 차원에서 지자체 등에 보고해야 하지만 도매법인들이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김 회장은 효성청과라는 도매법인의 주식을 아버지를 통해 갖고 있었으나, 직접 경영에 참여한 적은 없었다. 30대 후반 늦은 나이에 '효성청과'라는 도매법인의 대표가 된 그는 시장 내 경매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 김 회장은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불법 유통 차량이 들어오는 걸 알고 나가서 시장에 못 들어오게 하려고 트럭 앞에 드러눕기도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의 노력은 결국 시장의 변화를 이끌었고, 약 10년이 지나 대구농수산물도매시장은 경매가 정상화되었다. 효성청과도 성장해, 대표 취임 당시 매출이 200억원에 불과해 전국 200여 개 도매법인 중 하위권이었으나 현재는 매출 3000억원 규모로 커졌다.


김윤식 신협중앙회장이 대전 신협중앙회 본사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 하고 있다. 조용준 기자

김윤식 신협중앙회장이 대전 신협중앙회 본사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 하고 있다. 조용준 기자


신협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도 누군가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해서다. 1998년 당시 대구 세림신협 이사장은 경영상 어려움을 겪던 조합을 변화시키고자 효성청과 사례를 눈여겨본 뒤 김 회장에게 이사직을 제안했다. 이후 이사장이 물러나며 김 회장이 취임했다. 당시 세림신협은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자산이 60억원 수준에 그쳐 직원 급여도 지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의 근거지였던 대구농수산물도매시장의 중도매인·상인들을 설득해 조합 가입을 늘리고 출자금·예금 확대로 자산을 키우는 방식으로 경영 정상화를 추진했다. 그 결과 세림신협은 현재 자산 3000억원에 이르는 중견 조합으로 변모했다. 이후 김 회장은 신협 대구지역협의회장과 신협중앙회 이사를 거쳐 2018년 3월 신협중앙회장에 취임했다.


김 회장은 69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세계신협협의회(WOCCU) 이사, 아시아신협연합회(ACCU) 회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그의 건강 비결은 팔굽혀펴기와 스쿼트 등 맨몸운동을 하루도 빠짐없이 3세트씩 하는 것이다. 그는 "세트당 개수는 (내가)고통을 느낄 때까지"라며 웃었다. 이와 더불어 신협중앙회 본부 주변이나 대구 수성못을 산책하는 것도 자신만의 '힐링' 비법이라고 밝혔다.


"경영정상화 이행약정 조기 해제 가장 뿌듯"

2018년부터 연임을 포함해 8년째 신협중앙회장직을 수행 중인 그는 재임 기간을 돌아보며 가장 뿌듯했던 순간 세 가지로 ▲경영정상화 이행약정 조기해제 ▲농·소형조합 지원 제도 ▲8대 포용금융 정책을 꼽았다. 신협중앙회는 외환위기 당시 단위조합 부실로 적자에 시달렸다. 2007년 공적자금 2600억원을 받고 정부와 자금상황 및 이행 과제 등을 확약하는 약정을 맺었다. 약정에 의해 금융당국의 감독을 받으며 사업예산 증가율, 지역본부 통폐합 등에서 규제를 받았다. 2024년까지였던 경영개선명령은 2023년 조기 종료됐다.


농산물 불법유통 몸으로 막던 서예가, 서민금융 버팀목 되다[만보정담]

농·소형조합 지원 제도는 대도시에 위치해 영업기반이 탄탄한 대형조합에 비해 경영환경이 열악한 조합에 중앙회가 물적·인적 지원을 하는 것이다. 김 회장은 "1금융권이 수익성 저하를 이유로 지방에 위치한 점포를 줄이고 있는 상황에서 신협은 서민금융을 하는 만큼 수익 논리에 의해 무작정 줄일 수 없다"며 "오히려 은행 철수로 인한 노인 등 금융소외계층의 금융 공백을 메꿔야만 한다"고 했다. 해당 제도는 작게는 조합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생활용품 지원부터 영업점 환경개선,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지역축제 개최 지원 등이 있다.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지원 액수는 약 1175억원이다.


8대 포용금융 정책은 저출산·고령화·지방소멸 등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신협이 지난 7년간 추진한 역점사업이다. 이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가 전주한지산업 지원이다. 전주 흑석골은 한때 300개가 넘는 한지공방이 군집했었으나 현재는 6곳의 공방만 남았다. 이에 김 회장은 "지역산업 활성화와 전통문화 보전은 신협의 의무"라며 전주시·전주한지사업협동조합과 업무협약을 맺고 연구개발 및 판매지원, 한지장 후계자 양성사업, 원료 국산화 등을 진행했다. 이외에도 고금리 대출을 중금리로 전환해주는 '8·15해방대출'은 5년간 취급 건수 6만8957건, 취급액 7772억원을 기록했다.


"수신 관련 규제 풀지 못해 아쉬워"

8년 동안 뿌듯한 일만 있던 것은 아니다. 김윤식 회장은 상호금융 관련 규제, 특히 자금을 조달하는 수신 관련 규제를 풀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은행의 경우 예·적금뿐 아니라 은행채 발행 등 다양한 자금 조달 방법이 있으나, 상호금융은 대부분 1년 만기 예·적금과 조합원들이 납입하는 출자금으로 자금을 조달한다. 그는 "1금융권은 요구불예금도 많고 조달 방법도 다양해 낮은 금리로 자금을 수신한다"며 "상호금융권도 지자체 금고 입찰 참여를 할 수 있게 되는 등 규제가 완화되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윤식 신협중앙회장이 대전 신협중앙회 본사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 하고 있다. 조용준 기자

김윤식 신협중앙회장이 대전 신협중앙회 본사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 하고 있다. 조용준 기자


신임 회장에 건전성 관리, 서민금융 당부

다음 달 7일 8년 만에 신협중앙회장이 새 인물로 교체된다. 연임 제한 규정에 따라 김 회장은 출마가 제한돼 신협과의 동행에 마침표를 찍는다. 김 회장은 후임 회장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남겼다. 우선 철저한 건전성 관리다. 그는 "산업 전반에 걸쳐서 분위기가 감지되는데 내년부터 금융환경이 더욱 안 좋아질 것"이라며 "신협뿐 아니라 상호금융권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고 특히 연체율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서민 경제를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 특히 신협의 정체성 중 하나인 서민금융을 잘 챙겨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2020년 신협이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축복장을 받은 사례를 소개했다. 교황청은 신협이 60년 동안 사회적 약자와 금융 소외 계층을 지원하는 포용금융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온 점을 높이 평가하며 한국신협의 발상지인 부산에서 수여식을 열었다. 김 회장은 "단순한 영광을 넘어 신협이 앞으로도 사회적 역할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며 신협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이외에도 농·소형조합 지원제도를 지켜달라고도 했다. 자산 규모가 큰 조합들이 작은 조합을 돕는 '동반성장 시스템'을 차기 회장이 더 활성화해 농·소형조합이 조합 운영에 따른 부담을 경감하고 이는 다시 조합원의 금융 편익으로 돌아오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달라고 제언했다.


-김윤식 신협중앙회장 프로필

▲1956년 대구 출생 ▲효성청과 대표이사 ▲호텔아리아나 대표이사 ▲사단법인 무민재 대표 ▲신협 대구지역협의회장 ▲신협중앙회 이사 ▲한국협동조합협의회 회장 ▲세계신협협의회 이사 ▲아시아신협연합회 회장 ▲신협중앙회장





오규민 기자 moh01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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