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대목'의 상징과 같았던 달력 시장이 빠르게 소멸하는 분위기다. 디지털 전환과 비용 절감 흐름 속에서 대기업·금융권 등 주요 수요처가 제작을 잇달아 중단하는 영향이다. 반면 K팝·K드라마 등 K컬처 확산으로 소량다품종·굿즈 인쇄가 새로운 먹거리로 부상하고 있다.
28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올해 기업·기관의 달력 제작 물량은 전성기와 비교하면 70% 안팎까지 줄어든 것으로 파악된다. 최근 몇 년 사이 감소 폭도 점점 커지고 있다. 서울 중구의 한 인쇄업체 대표는 "연말 달력 시장이 인쇄업계의 가장 큰 매출원이었는데 최근 들어 급속도로 주문이 줄었고 사업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해지고 있다"는 말로 요사이 분위기를 설명했다.
서울 중구 을지로 인쇄골목. 이성민 기자
달력 주문 감소는 업계 전반의 구조 변화와 맞물린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대기업들은 연말에 지급하는 달력의 물량을 조금씩 줄였고 아예 없앤 곳들도 많아졌다. 중소기업들도 비용 절감을 위해 중국에서 기성품을 들여와 상호만 넣던 주문 관행을 멈추거나 축소했다. 서울 중구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30년 넘게 일해온 60대 A씨는 "특히 집에서 벽걸이 달력을 걸어두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 않으냐"며 "탁상용 달력만 가끔 나가는 정도"라고 말했다.
달력 시장이 사라지면서 인쇄업계는 출혈 경쟁에 내몰렸다. 인쇄는 주문형 생산이어서 기계를 멈추면 고정비 부담이 커진다. 일감을 유지하기 위해 원가 이하 단가라도 수주해야 하는 구조가 굳어졌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또 다른 인쇄업계 관계자는 "본전도 못 찾는 가격이어도 발주를 받지 않으면 기계를 세워둬야 한다"며 "성수기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적자 수주가 흔하다"고 말했다. 달력의 경우 비수기인 8월부터 단가를 낮춰 미리 발주받는 사례도 많아졌다.
그렇다고 인쇄업 전체가 위축된 건 아니다. 달력·홍보물 같은 대량 제작 품목 수요는 크게 줄었지만 그 빈자리를 굿즈·포토북·팬아트 등 소량다품종 인쇄가 빠르게 채우고 있다. 대내외 경기 변수와 미국발 관세 여파 속에서도 인쇄물 수출은 예상보다 선전하고 있다는 평가다.
관세청에 따르면 올해(1~10월) 인쇄물 수출은 3억3709만달러로 전년 대비 7.3% 증가했다. 연말 특성상 물량이 몰리는 점을 고려하면 연간 증가율이 10%까지 확대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교과서·리플릿뿐 아니라 K컬처 기반 굿즈가 수출을 이끌었다는 분석이다. 산업의 중장기적 전망을 가늠할 수 있는 인쇄기자재 수입도 같은 기간 4.8% 늘어난 3억3918만달러를 기록했다.
김윤중 서울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은 "K팝 굿즈 등 소량다품종 제품을 통해 인쇄업계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가고 있다"며 "이제 인쇄물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로 유통된다.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데 쓰이는 교재부터 팬들이 소장하는 굿즈까지 한국 인쇄산업이 문화 확산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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