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염전, 광주 요양병원 모두 저를 물건으로만 생각했죠."
A씨는 신안 염전에서 수십년간 노동 착취를 당해오다 최근까지 광주 한 요양병원에서도 금품·보조금을 갈취당했다.
1965년생으로 경기도가 고향인 A씨는 어린 나이부터 보육원에 보내져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다. 그렇게 스무살이 됐을 무렵 A씨가 돈을 벌기 위해 찾은 곳은 신안의 한 섬마을에 위치한 염전이었다. A씨는 어렴풋이 "누군가 일자리를 소개해 준다며 그 염전으로 데려갔다"고 기억했다.
신안 염전 노동착취 피해자가 손에 흉터를 가리키며 염전주에게 당했던 폭행으로 남은 상처라고 설명하고 있다. 민찬기 기자
첫날부터 염전 주인은 망치로 A씨의 머리를 폭행했다. 일을 똑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A씨에 대한 폭행은 그 염전에서 일하는 10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졌다. 어느 날은 염전 주인이 삽으로 A씨를 때리려 하자 "진짜 죽겠구나" 생각해서 필사적으로 손으로 막았다. 그때 생긴 흉터가 아직도 A씨의 손에 남아있다. 또 A씨가 돛단배를 띄워 섬을 탈출하려 시도했었는데, 금세 주인에게 붙잡혀 허리와 다리 등 온몸에 매를 맞았다. 당시 폭행으로 아직도 A씨는 허리에 통증을 달고 산다.
"그 섬마을엔 버스가 2대 다녀요. OO 교회에서 오른쪽으로 20분 정도 버스를 타면 그 염전이 나와요." 수십 년이 지났어도 A씨는 그 염전으로 가는 길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 일대엔 염전 마을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염전 주인마다 노동자 1~2명을 고용하고 있다고 했다.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주인이 시키는 대로 품앗이를 하러 가는 것이 일상이며, 폭행은 그곳에서도 이어졌다. 소금을 실으러 외부에서 온 화물차 운송기사들이 노동자들에게 용돈으로 1만~2만원을 종종 챙겨주기도 하는데, 이마저도 주인이 곧바로 뺏었다. 새벽부터 강제로 기상해 해가 져도 노동을 하는 등 근무 시간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10년 동안 이 염전에서 임금 체불·폭행·노동 착취 등에 지친 A씨는 다른 염전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A씨는 그 염전의 고용주를 OO 형님이라 불렀다. 그만큼 전에 일하던 염전에 비해 근무 환경은 나아졌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15년을 일했을 무렵 염전 일을 그만두고 고향인 경기도를 다시 찾았다.
평생을 염전에서 일만 해 온 탓에 A씨는 경기도에서도 일감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그렇게 고향에서 방황하다 10여년 전 다시 또 누군가의 소개로 신안의 한 염전에 오게 됐다. 그러던 중 '신안 염전 노예' 사건이 불거지게 됐고, 폐업 등의 이유로 염전 주들이 A씨를 포함해 수많은 염전 노동자를 광주 광산구 모 교회와 요양병원으로 보냈다. 이 교회의 목사는 박 모씨로, 광주 북구 모 요양병원의 건물주다.
A씨는 "당시 염전 주들이 박씨와 친분이 있던 관계로 기억한다. 한 염전 주는 박씨와 가족 관계였을 것이다"며 "2018년 말에 병원에 왔는데, 와서 보니 신안 염전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을 많이 만났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A씨를 포함해 입원 환자들은 기초생활 생계급여가 들어오는 통장을 개설하고 곧바로 갈취당했다. 이들 대부분은 의사무능력자로 통장을 개설할 시기에 누군가와 은행에 동행했던 것만 어렴풋이 기억했다. 그 뒤론 통장의 행방은 전혀 모른 채 가끔 4만~5만원 수준의 용돈만 받았다는 것이 입원한 환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A씨는 "병원이라 해도 입원해 있는 동안 제대로 된 치료는 받은 적은 없다. 갈 곳이 없다 보니 형식상 입원해 있었다"며 "최근엔 박씨가 계속해서 15만원을 빌려달라고 요구하길래 다른 병원으로 옮긴 상태"라고 말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