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
■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박수민 PD
■ 출연 : 이현우 기자
중국 정부가 일본에 대한 전방위 압박에 나서면서 이른바 '한일령'이 본격화되고 있다. 과거 한국을 겨냥했던 '한한령'과 유사한 방식으로, 중국은 자국민의 일본 관광을 제한하고 일본산 수산물 수입을 금지하는 등 강도 높은 조치를 쏟아내고 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제는 상당한 타격이 예상되는 반면, 한국은 단기적 수혜와 장기적 우려라는 복잡한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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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일령의 직접적인 발단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관련 발언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대만에서 전함을 사용한 무력 행사가 수반되면 일본의 존립 위기 사태가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겉보기에는 조심스러운 표현이지만, 이는 일본이 대만 유사시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문제의 핵심은 '존립 위기 사태'라는 용어에 있다. 일본은 헌법상 정식 군대가 아닌 자위대만을 보유하고 있으며, 자위대는 외국 침략으로 인해 국가의 존립 위기 사태에 놓였을 때만 응전할 수 있도록 법으로 제한돼 있다.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은 대만에 대한 중국의 무력 침공을 일본의 존립 위기 사태로 규정함으로써, 자위대가 대만 해협에 출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으로 풀이된다.
더욱이 이는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로도 해석될 수 있어 논란이 커졌다. 집단적 자위권은 자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나라가 타국의 침공을 받을 때 자위대가 해당 지역으로 출동할 수 있다는 논리다. 여기에 일본의 존립 위기 사태로 규정될 경우 미일 동맹에 따라 미국도 자동으로 참전할 명분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중국의 반발은 더욱 격렬해졌다.
중국은 대만을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중국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대만 문제는 중국의 내정이며, 외국의 개입은 내정간섭이라는 것이 중국의 일관된 입장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은 중국의 핵심 이익을 건드린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중국은 즉각적이고 강력한 대응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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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령은 사실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 용어는 아니다. 한한령과 마찬가지로 인터넷상에서 민간이 사용하기 시작한 표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국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 민간이 따라가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어, 사실상 정부 주도의 조치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중국 정부는 먼저 자국민에게 일본 방문과 유학을 자제하라는 권고를 내렸다. 표면적으로는 권고지만, 중국에서 정부의 권고는 사실상 지시나 다름없다. 이후 민간에서는 일본 항공권 50만장이 취소됐고, 일본 아이돌의 팬미팅과 애니메이션 개봉이 잇따라 취소됐다.
중국 정부가 일본산 수산물 수입 중지 카드까지 꺼내들자, 민간에서는 일본 회와 초밥을 먹지 말자는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정부가 먼저 방향을 제시하고 민간이 뒤따르는 이러한 방식은 한한령 때와 동일한 패턴이다. 중국 정부가 아무리 "정부 공식 입장이 아니다", "민간 주도"라고 해명해도 어느 나라도 이를 믿지 않는 이유다.
한한령은 처음에는 문화 교류 제한으로 시작해 관광과 여행에 빗장을 걸고, 마지막에는 교역까지 장벽을 세우는 방식으로 빠르게 확대됐다. 일본도 같은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아 대응이 쉽지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일본 관광업계는 벌써 큰 타격을 예상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중국인은 약 700만명으로, 한국인(880만명)에 이어 두번째로 많았다. 올해는 9월까지 이미 750만 명을 넘어서 역대 최대 기록을 경신할 것으로 전망됐으나, 한일령으로 급제동이 걸렸다. 항공과 숙박 취소, 중국인 소비액 등을 종합하면 일본은 최소 2조2000억엔, 우리 돈으로 약 21조원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수 있다. 한일령이 심화돼 주요 교역품 제한이나 희토류 수출 중단 같은 카드까지 나온다면 피해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중국의 조치는 속도와 강도 면에서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가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처럼 신속하고 강력한 압박이 이어지자, 일부에서는 중국이 신임 일본 정부를 '길들이기'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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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비해 일본 정부는 중국의 압박에 즉각적인 맞대응 조치를 내놓지 않고 있다. 오히려 차분하게 대응하거나 지켜보자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대신 정부 각료와 보수 정치인들이 TV에 출연해 반중 정서를 자극하는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중국 외교부의 류진숭 아시아 국장과 일본 외무성의 가나이 마사하키 국장이 만난 자리에서 가나이 국장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포착됐다. 중국 국영 매체들이 이 장면을 일제히 공개하자 일본 내 반중 감정은 더욱 고조됐다. 일본에서는 이를 '굴욕 외교'라고 비판하며, 우익 단체들은 중국과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까지 제기하고 있다.
일본 자민당과 보수 정치권에서는 반중 정서가 완전히 위기만은 아니라는 계산도 깔려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조기 총선론이 제기되고 있는데, 선거가 실시될 경우 보수층 결집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반중 정서는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카드가 된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대응을 자제하면서 반중 정서만 부추기는 전략으로 가되, 장기적으로는 대응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 역시 대중국 의존도가 높은 국가이기 때문에, 중국이 주요 수출품이나 원자재 공급을 차단할 경우 다시 저자세로 돌아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한국 입장에서 한일령은 단기적으로는 기회로 보인다. 연간 700만 명 이상의 중국인이 일본을 방문했는데, 이 중 일부라도 한국으로 방향을 틀면 상당한 관광 특수가 예상된다. 실제로 여행·관광 관련 주식이 상승세를 보이는 등 시장은 벌써 반응하고 있다. 절반만 한국으로 온다고 해도 10조원 이상의 특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마냥 호재로만 보기 어렵다는 우려도 함께 나온다. 한일령의 본질은 미중 간 군사적 갈등이기 때문이다. 한한령도 2017년 미국의 사드 배치 문제에서 비롯됐듯이, 한국 역시 미중 관계에 따라 언제든 한한령이 다시 강화될 수 있다.
중국의 노림수는 단순히 일본을 압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아시아 주변국들에게 '중국에 확실히 줄을 서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중국은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통해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는데, 이들 국가에게 '중국과 척을 지면 이런 대가를 치른다'는 본보기를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미국이 적극적으로 일본을 보호하지 않는 상황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결국 중국과 척을 지면 위험하다'는 각인 효과를 주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도 미중 외교 경색이 심해지면 한한령이 재강화될 위험성이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현재의 한일령 상황은 단순히 한국에 관광객이 늘어나는 기회로만 볼 수 없다. 이는 미중 패권 경쟁의 한 단면이며, 한국도 언제든 같은 압박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대중 교역 문제, 공급망 이슈, 안보 동맹 등 복합적인 요소들을 고려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전략적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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