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1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한미 관세협상 팩트시트 및 전략적 투자에 관한 양해각서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5.11.14 조용준 기자
"처음엔 개운했는데 지금은 좀 씁쓸합니다."
한미 관세협상의 최전선에 섰던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17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소회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을 30번 만나고 통화·문자를 300번 넘게 주고받으며 한미 관세·투자 패키지 협상을 끌고 온 당사자 입에서 "심장이 마르는 순간도 있었다"는 말도 나왔다. 그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 생각하지만, 협상 결과를 보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우리 국력의 한계를 실감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김 장관은 이날 오전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이번 협상 점수를 "과락은 면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정치권에서 "알맹이 없는 백지 시트"라는 비판까지 쏟아지는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다. 그는 "열심히 했다고 해서 점수가 저절로 오르는 건 아니다. 우리가 가진 산업과 국력의 크기가 협상력을 결정한다"며 "이번에는 여기까지지만, 후배들은 150점을 받을 수 있도록 국력을 키워야 한다고 늘 이야기하고 있다"고 했다.
협상 상대였던 러트닉 장관에 대해서는 "진짜 터프한 협상가"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김 장관은 "회의 중에 본인에게 불리한 흐름이 보인다 싶으면 표정 하나 안 바뀐 채 그냥 벌떡 일어나 '너와는 더 이상 얘기할 필요 없다'며 나가버리곤 했다"며 "제가 달려가 '일단 앉으시라'라며 붙잡았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럼에도 그는 "러트닉 장관이 미국 제조업을 되살리겠다는 애국심과 열정만큼은 존경스럽다"며 "그런 상대를 상대로 지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협상의 분수령이 된 대목 가운데 하나로는 지난 9월을 꼽았다. 당시 미국 측은 3500억달러 전액 현금투자 방식에 가까운 구조를 고집했고, 한국 측은 외환시장 충격 등을 이유로 분납 구조와 통화스와프 등을 설득하고 있었다. 김 장관은 "그때는 우리 협상단이 미국에 가도 면담이 안 잡혔다. 실무자 미팅도 막히고, 제가 러트닉 장관에게 문자를 보내도 답이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돌파구는 전혀 다른 곳에서 열렸다. 러트닉 장관의 과거 9·11 테러 경험이었다. 그가 다니던 회사의 동료 직원들 656명과 동생이 쌍둥이 빌딩에서 함께 근무하다 모두 숨졌고, 이후 매년 추모 예배를 드려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김 장관은 "협상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겠다. 그저 9·11 추모 예배에 참석하고 싶다"는 짧은 문자를 보냈다. 며칠째 침묵하던 러트닉 장관이 곧바로 "Yes, thank you(알았다. 고맙다)"라는 답장을 보내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김 장관은 "외부인이 그 예배에 참석한 건 제가 처음이었다고 들었다"며 "예배를 드리고 돌아온 그날 저녁 '내일 오후에 만날 수 있느냐'라는 연락이 왔다. 그 시점을 기점으로 분납 논의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했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건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는 것이라는 영화 대사가 떠올랐다"며 "온 국민의 성원과 기도가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경주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의 극적 타결도 우연만은 아니었다. 회의 직전까지 주요 쟁점이 풀리지 않으면서 국내외에선 "APEC까지는 결론이 안 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김 장관 역시 "당시만 해도 저희도 안 될 거라고 보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가 택한 마지막 수단은 '메시지 관리'였다. APEC 개막을 앞둔 이른 아침, 러트닉 장관에게 "여기까지 잘 해왔으니 협상은 계속 이어가되, APEC 기간에는 양국이 동맹으로서의 체면을 지킬 수 있는 메시지를 내자"라는 취지의 문자를 보냈다.
미국 측은 이 문자를 한국의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였다. 김 장관은 "저는 어디까지나 외교적 메시지를 깔끔하게 관리하자는 뜻이었는데, 미국은 '여기서 더 밀리면 협상이 깨진다'는 신호로 받아들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미국 측에서 "한국 측 의견을 받아들이겠다"는 취지의 회신이 왔다.
김 장관은 국회 비준 논란에 대해선 우려를 나타냈다. 헌법상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은 국회의 비준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을 근거로 야당은 비준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 장관은 "법적으로 보면 이번 합의는 조약이 아니기 때문에 비준 대상이 아니다"면서도 "문제의 본질은 법 논쟁을 떠나 우리가 스스로 협상 내용을 국내법으로 못 박아 손발을 묶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장관은 투자 배분비율 5대 5 조항과 관련해서도 "이 부분은 저도 아쉬워하는 대목인데, 비준을 해버리면 앞으로 더 유리하게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사라진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약 비준은 국내법적 효력을 갖기 때문에 그 안에 적힌 조항들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일본도, 미국도 비준을 하지 않았다. 우리만 자발적으로 손발을 묶는 건 전략적으로 자충수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재정 부담과 관련된 부분은 별도의 특별법을 통해 국회의 동의를 거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팩트시트에 담긴 세부 쟁점에 대해서도 해명에 나섰다. 투자사업 심사 기준에 포함된 '상업적 합리성' 문구에 대해 그는 "어느 프로젝트가 원리금 회수에 충분한 현금흐름을 만들 수 있는지 따지겠다는 의미"라며 "이 한 문장을 넣기 위해서도 러트닉 장관의 기분과 협상 타이밍을 재며 여러 번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투자위원회와 최종 승인 구조에 대한 우려에 대해서는 "형식상 트럼프 대통령이 최종 결정을 하게 돼 있지만, 실제 프로젝트 발굴과 운영은 양국이 함께 만드는 위원회와 한국 측 매니저가 맡게 된다"며 "위원회에서 논의된 안을 러트닉 장관이 이끄는 투자위원회가 검토하고, 그 결과를 대통령이 결재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이어 "프로젝트 운영 책임을 한국 매니저가 지고 참여 기업도 한국 기업이 우선하도록 설계돼 있다"며 "미국도 자국 제조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업에 무작정 투자하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김 장관은 반도체 조항과 관련해 "대만보다 불리하지 않은 조건을 적용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며 "다만 정부 간 공식 문서에 특정 국가 이름을 직접 넣는 것은 외교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어 '미국이 판단하기에'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말레이시아 등 다른 반도체 생산국도 있기 때문에 특정 국가를 콕 집어넣기 어렵다는 문제였다"며 "그 문구 때문에 한국이 대만보다 불리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농산물 시장 개방, 유전자변형생물체(LMO) 관련 비관세 장벽 완화 논란에 대해서도 선을 그었다. 김 장관은 "쌀이나 쇠고기, 월령 제한 같은 부분에 대해 이면 합의가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 건 전혀 없다"고 못 박았다. LMO 심사 절차에 대해서는 "야당에서는 '간소화'라고 표현하지만 국내에서도 부처 간 절차가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지적이 있어 와 있던 사안을 효율화하는 차원에서 정리한 것"이라며 "미국 농산물이 물량 폭탄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일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실제 데이터를 보시면 판단이 서실 것"이라고 했다.
김 장관은 이번 협상을 "보이지 않는 경제 전쟁의 한 장면"으로 규정했다. 그는 "물리적 전쟁이 벌어지는 나라들도 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충돌은 관세와 투자, 공급망을 둘러싼 경제 전쟁의 형태로 나타난다"며 "그 전선의 최전방에 서 있는 건 우리 기업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업의 경쟁력이 올라가고 산업의 힘이 커질수록 어느 나라도 쉽게 한국을 대할 수 없게 된다"며 "국민들께서 우리 기업을 더 응원해 주시고, 정부와 기업이 함께 국력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제 남은 건 세부 프로젝트를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어떻게 설계하느냐, 자동차 관세의 소급 적용을 위해 국회와 얼마나 빨리 법을 정비하느냐 같은 후속 작업"이라며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결국 국력을 키우는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이번 협상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치른 경기였다. 다음 세대 협상가는 더 평평한 운동장에서, 더 당당하게 협상할 수 있도록 산업과 기업을 키워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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