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달러화 가치의 변동이 단지 수출입 가격을 바꾸는 환율 문제를 넘어, 세계 무역 흐름 전체를 조절하는 금융적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달러 강세 시, 달러로 외화 차입을 많이 한 국가의 기업들은 자금조달 비용 상승으로 수출 가격을 인상하고, 결국 수출 물량 감소로 이어지는 '금융 채널(financial channel)'이 작동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는 국제 무역의 가격 결정이 달러로 이루어진다는 기존의 '지배통화의 가격결정(Dominant Currency Pricing)' 이론을 넘어, 세계 무역이 달러 기반의 금융조달 구조에 의해 규율되고 있다는 해석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산하 연구진인 '사이 마'와 '팀 슈미트-아이젠로어'가 지난 6월 옥스퍼드대 출판부에서 발행하는 'The Review of Financial Studies'를 통해 발표한 논문, '환율의 금융 경로와 글로벌 무역(The Financial Channel of the Exchange Rate and Global Trade)' 연구에서 이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1990~2018년 40여개국의 무역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달러 가치가 상승할 때 달러 표시 부채 비중이 높은 수출국일수록 수출 가격이 더 많이 오르고 수출량은 큰 폭으로 감소한다는 결과를 확인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더 강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산하 연구진 '사이 마'(왼쪽)와 '팀 슈미트-아이젠로어'(오른쪽). (사진=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홈페이지)
연구에 따르면 달러 환율 변동으로 세계 무역이 요동치는 원인에 대해 '달러 가치 상승 → 기업과 금융기관의 대외부채 부담 증가 → 무역금융(trade finance) 축소 → 수출가격 상승 및 수출량 감소'로 이어지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국제 무역 거래는 표면적으로는 상품 가격과 환율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제 거래 단계에서는 생산·선적·운송에 필요한 자금이 선제적으로 투입되는 무역금융이 필수적이다. 문제는 이 무역금융의 상당 부분이 달러로 차입된다는 것인데, 수출 기업이나 이를 중개하는 금융기관이 달러 부채를 보유하고 있을 경우, 달러 강세는 곧 대차대조표 리스크로 전이된다는 점이다.
논문에 따르면, 수출기업의 자금조달 압박은 곧바로 가격과 물량에 반영된다. 수출기업은 자금조달 비용 상승분을 가격에 전가하거나, 아예 수출 자체를 줄일 수밖에 없다. 이는 환율 변동이 무역 조건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금 조달의 가용성'이라는 금융 채널을 통해 조절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연구진은 특히 '수출국의 달러 부채 규모'가 달러 강세의 무역 충격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라고 강조했다. 무역 상대국(수입국)이 아니라 수출하는 쪽의 '금융 구조'가 달러 충격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지배적 통화 가격 책정(Dominant Currency Paradigm) 이론, 즉 달러가 결제통화로 사용되기 때문에 수입국이 달러 환율 변동 충격을 받는다는 설명과는 작동 지점이 다르다. 이번 연구가 밝힌 것은 달러 충격의 중심축이 '가격의 달러 표기'가 아닌 '금융의 달러 의존도'라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으로 수입되는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예외 없는 25% 관세 부과 포고문에 서명한데 이어 자동차와 반도체 등에 대한 관세 부과도 검토중이라고 밝힌 가운데 13일 경기 평택항에 수출용 자동차가 선적 대기하고 있다. 2025.2.13. 강진형 기자
연구는 또 달러의 움직임이 세계적 금융 환경 전반을 매개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달러 강세는 글로벌 자금조달 비용을 높여 신흥국 중심으로 신용 경색을 유발한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수출품 가격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수출국의 기업 및 금융기관의 대차대조표가 악화하며 신용 공급 여력이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무역 자체가 수축하는 '연쇄적 긴축 효과'가 발생한다.
연구진은 달러 가치와 무역 사이의 인과관계를 검증하기 위해 미국 내 주택 건축 허가 건수를 '도구 변수'로 활용했다. 미국 주택 시장의 변동은 달러 가치에 영향을 미치지만, 제3국 간 무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방법을 통해 달러 가치 상승이 수출가격 상승·수출물량 감소를 유의하게 유발한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났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특히 달러 강세기의 세계 무역 위축 속도는 달러 부채 의존도가 높은 수출국일수록 더 가파르게 나타났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흥국·자원국·중남미 일부 국가에서 나타난 '수출 침체 → 부채 부담 증가 → 성장 둔화'의 악순환을 설명하는 유효한 근거로 제시된다.
연구진은 이러한 금융 경로의 강화가 앞으로 달러의 '국제 금융 중추' 역할을 더욱 공고히 할 가능성을 지적했다. 달러 중심의 국제 금융 구조가 유지되는 한, 세계 무역은 가격 경쟁력보다 '달러 조달 능력'에 더 크게 좌우되는 시대적 변곡점에 놓여 있다는 평가다. 연구진은 "달러는 더 이상 단순한 결제 통화가 아니라 '세계 무역을 조절하는 레버'로 기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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