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벤처투자 시장이 하반기 기업공개(IPO) 재개와 함께 본격적인 회복 국면에 진입할 전망이다. 하반기로 갈수록 상장 기업 시가총액 규모도 확대되면서, 벤처투자의 '엑시트(투자금 회수) 및 재투자' 선순환 구조도 활성화될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10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명인제약 단 한 건에 그쳤던 국내 IPO 시장은 이달부터 본격 재가동될 예정이다. 스팩(SPAC, 기업인수목적회사) 상장을 제외한 일반기업 공모청약은 이달 12개, 다음 달 7개가 우선 예정돼 있다. 연말까지 약 20개 벤처 회사가 상장사로 거듭나는 것이다.
김수연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IPO가 늘어나기 시작하면 상장의 앞단인 비상장 시장의 회복도 빨라질 것"이라며 "대형 IPO를 통한 엑시트 자금이 벤처캐피털(VC)에 재투자되는 선순환이 기대된다"고 분석했다.
상장 기업 규모가 확대되는 것도 주목할 지점이다. 연내 상장에 나선 ADC(항체·약물접합체) 신약 개발 기업 '에임드바이오'와 반도체 디자인하우스 '세미파이브'는 시가총액 5000억원 이상을 목표로 관련 절차를 밟고 있다. 수술 로봇 기업 '리브스메드'는 1조원 이상 시총을 목표로 한다. 상반기 1000억~2000억원 수준이 주류였던 상장 규모가 하반기에는 한 단계 상승한 셈이다.
그간 시장을 주도한 인공지능(AI) 섹터(업종)뿐만 아니라, 바이오 섹터에서도 투자 심리가 개선되고 있다. 비상장 기업들의 기술이전(라이선스 아웃) 성과가 이어진 점이 주효했다. 글로벌 제약사들과의 기술이전 계약이 늘어나면서 바이오 벤처의 가치가 재평가받은 것이다.
정부와 거래소의 제도 개선 역시 VC의 엑시트 환경 개선에 힘을 보태고 있다. 한국거래소는 인공지능(AI) 기술특례 상장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기술성장 기업 상장 시 요구되는 기술평가 특례 요건을 완화하고, AI 분야 특성을 반영한 평가 기준을 마련했다. 금융투자협회도 현행 25%인 코스닥벤처펀드의 코스닥 공모주 배정 비율을 내년 30%로 상향 조정할 계획이다. 벤처펀드의 IPO 참여 기회를 확대해 투자 수익률을 높이고, 이를 통해 벤처 재투자를 촉진한다는 전략이다.
IPO 시장의 활기는 벤처투자 생태계로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벤처투자 분석 플랫폼 혁신의숲 집계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스타트업 84개사가 총 3862억원의 신규 투자를 유치했다. 시드(Seed) 단계부터 프리IPO(Pre-IPO)까지 단계별로 고른 투자가 이뤄졌다. 지난 9월부터 두 달 연속으로 헬스케어·바이오가 투자액과 기업 수 모두 1위를 기록하며 투자 열기가 지속됐다.
대표적으로 아이엠바이오로직스가 422억원, 디맵바이오가 256억원, 메디팹이 238억원을 각각 유치했다. 프리(Pre) IPO 단계에선 아이엠바이오로직스 외에도 모빌리티 서비스 기업 오토핸즈, 자원순환 기업 수퍼빈 등이 대규모 투자를 받았다. 이밖에 제조·하드웨어 분야가 632억원으로 2위, 커머스가 556억원으로 3위를 기록했다.
글로벌 벤처투자 시장의 회복세도 한국 시장에 긍정적인 신호다. 김 연구원은 "미국은 올해 들어 지난 10월까지 VC 투자금이 3240억달러(약 472조원)로 전년 동기 대비 49% 급증했다. 지난 10년간 세 번째로 활발한 해가 될 것"이라며 "2023년을 저점으로 확실한 회복세를 보이는 상황"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AI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압력도 있지만, 대형 IPO로 엑시트가 늘어난 점도 영향을 미쳤다"며 "미국의 회복은 한국의 반등 가능성을 높여준다. 한국도 비슷한 궤적을 따라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국내 한 중견 VC 대표는 "그간 막혀 있던 엑시트 경로가 열리면서 VC들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며 "성공적인 엑시트 사례가 지속해서 늘어나면, LP(출자자)들의 출자도 증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VC들이 그간 불가피하게 보수적인 투자 기조를 이어갔는데, 시장에 유동성이 공급되면 본격적으로 초기 투자 비중을 늘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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