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팩트 폭격'의 시대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양의 사건 사고 사실들이 폭탄처럼 쉴 새 없이 대량 투하된다. 수치, 통계, 인용, 영상, 데이터 그래프가 "이래도 안 믿겠습니까"라며 쉼 없이 쏟아진다. 생각해보자. 이런 팩트 폭격이 우리를 정말 진실에 가깝게 데려다주는 걸까.
영국 에든버러에서 버스를 탔을 때였다. 빈 자리가 많은데도 한 중년 여인이 커다란 검은 개를 동반하고선 내 친구 옆 좌석에 앉았다. 개는 좌석 밑으로 몸을 죽 밀더니 두 개 좌석 밑 공간을 통째로 차지했다. 친구는 두 발을 허공에 든 채로 목적지까지 불편한 자세로 가야 했다. 여인은 내릴 때까지 미안하다는 일언반구 인사도 없었다. 친구는 "저런 오만함은 인종차별"이라며 씩씩댔고, 우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동행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개에 안내견 표지가 있었어요." 순간, 우리가 함께 보았던 사실이 뒤집혔다. 같은 장면이었지만 의미는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도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강연 중, 앞줄의 두 사람이 계속 소곤거리는 것을 보고 참다못해 "잡담을 하고 싶으면 나가서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그들 중 한 사람이 외국인이어서 다른 한 사람에게 강의 내용을 통역해주고 있었다.
장면보다 중요한 것은 맥락이고, 사실과 진실은 차이가 있다. '안회습진(顔回拾塵)'의 고사도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를 떠돌던 공자 일행이 며칠을 굶주렸을 때, 제자 자공이 어렵게 쌀을 구해왔다. 안회가 밥을 짓고 있었는데, 자공이 부엌을 지나다가 그가 솥에서 밥을 떠먹는 장면을 목격했다. 모두가 배고픈데 혼자 먼저 먹다니, 자공은 이 사실을 공자에게 알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고민 끝에 공자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 "방금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뵈었으니 이 밥으로 제사를 지내야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안회가 황급히 대답했다. "조금 전 밥 위에 재가 떨어져 그 부분을 걷어내느라 먹었습니다." 산 자가 먼저 먹은 밥을 제사에 올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공자는 탄식했다. "눈을 믿었으나 눈이 틀렸고, 마음으로 믿는다면서 마음 또한 흔들렸구나."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팩트를 마주한다. 짧은 영상의 한 클립, 문맥이 잘린 인용문 한 줄, 편집된 당사자의 목소리, 그 한 줄, 한 컷의 영상으로 사람과 사건을 판단하고 재단한다. 데이터와 수치가 넘치는 세상에서 맥락과 스토리는 사라진다. 팩트를 보는 사람은 현상을 관리하지만, 맥락을 읽는 리더는 서사구조를 바꿀 수 있다. 팩트는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보여주지만, 맥락은 "왜 일어났는가"를 묻는다.
시력과 시각의 차이는 여기서 갈린다. 시력은 눈의 기능이지만, 시각은 의식의 선택이다. 시력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면 시각은 '어디서 보느냐'이다. 시각은 눈을 크게 뜨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위치를 옮겨보는 것이다.
속도보다 심도를, 확신보다 질문을, 장면보다 스토리를, 분석보다 해석을 택하는 일이다. 같은 장면이라도 나의 관점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의미가 드러난다. 에든버러의 여인은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우리를 '못 본' 것이었다. 스티븐 코비의 청중은 잡담하는 방해꾼이 아니라 배우려는 열정가였다. 안회는 배고픔을 못 참는 조급한 제자가 아니라 재 묻은 밥 한술도 아끼고자 한 제자였다. 팩트 폭격의 시대일수록 필요한 것은 시력보다 시각이다. 더 많이 본다고 해서 더 깊이 보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종종 눈앞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쪽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바쁨과 조급함과 정보 과잉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력보다 시각 점검이 아닐까. 시력은 안경 등 도구가 향상시킬 수 있지만, 시각은 내가 직접 움직여야 전환될 수 있다.
김성회 CEO 리더십연구소장/코칭경영원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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