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023년부터 '유통기한'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소비기한 표시제를 전면 시행하면서, 마트 진열대와 제품 포장지에서 '유통기한'은 사라지고 있다. 유통기한이 '판매 가능 시점'을 기준으로 했다면, 소비기한은 '섭취 가능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
소비기한은 소비자 입장에서 식품의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실제 기간'을 알려주는 제도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소비기한은 안전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범위에서 품질이 유지되는 기간"이라며 "유통기한보다 평균 30~50% 더 길다"고 설명했다. 냉장고 속에서 '하루 지난 음식'이 꼭 버려야 할 음식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2일 식약처 및 업계에 따르면 식약처는 지난 3년간 179개 식품 유형, 1450개 품목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실·저장고·유통 환경을 재현해 품질 변화, 미생물 증식, 산패(酸敗), 관능 평가 등을 종합해 '과학적으로 검증된 수명'을 계산했다.
과자는 소비기한 참고 값이 122~496일, 초콜릿은 121~294일이었다. 김치는 31~106일, 두부는 33~38일로 집계됐다.
기름류는 가장 안정적인 품목으로 꼽혔다. 참기름·들기름·해바라기유·콩기름은 11~32개월까지 안전성이 확인됐다. 특히 밀폐 용기에 담아 빛을 차단했을 때 산패가 늦어지는 경향이 뚜렷했다. 간장류도 마찬가지다. 한식 간장·양조간장·혼합간장의 소비기한은 16개월~996일(약 2년 7개월)로 확인됐다. 간장류는 염분이 높고 pH가 낮아 세균이 번식하기 어렵다.
냉장 보관이 필수인 두부의 소비기한은 22~28일이다. 육류는 조리 여부에 따라 차이가 뚜렷했다. 생육의 소비기한은 약 48일, 가열·가공된 햄·소시지는 50~90일 수준이었다. 마요네즈·케첩 등 조미식품은 평균 11개월, 냉동 만두나 간편조리세트는 ?18℃ 이하에서 약 500일 동안 안전성이 유지됐다.
냉동식품은 미생물 활동이 사실상 멈추지만, '재냉동'은 금물이다. 한 번 녹았다가 다시 얼리면 수분이 생겨 세균 번식 위험이 커진다. 냉동식품은 해동 후 즉시 조리해야 한다.
미국 농무부(USDA)는 보고서에서 "섭씨 ?18도(화씨 0도) 이하에서 지속 냉동된 식품은 영양적·미생물학적 안전성이 무기한 유지된다"고 명시했다. 다만 '안전'과 '품질'은 다르다. 냉동은 세균 활동을 멈추지만, 식감과 풍미는 서서히 떨어진다. 가정용 냉동실은 문을 자주 여닫아 온도 유지가 어렵다. 실제 품질은 산업용 냉동보다 빠르게 저하된다.
USDA는 실험을 통해 각 식품의 '품질이 유지되는 냉동 기간'을 제시했다. 소고기나 돼지고기는 냉장 상태에서는 3~5일 만에 품질이 급격히 떨어지지만, 냉동하면 최대 12개월(1년)까지 보관 가능했다. 냉동한 스테이크는 9개월 후에도 단백질 변성이 10% 미만, 색상 변화는 5% 이내였다.
신선 생선은 상하기 쉽지만, 잡은 직후 ?18°C 이하에서 급속 냉동하면 6~8개월까지 품질이 유지됐다. 지방 많은 생선(연어·고등어)은 2~3개월, 대구·명태처럼 지방이 적은 생선은 6~8개월이었다. 새우·게·랍스터 등 갑각류는 10~12개월, 조개·홍합은 3~6개월이 안전했다. 냉동 생선의 '비린내'는 산화보다는 해동 중 단백질 변성 때문이다. 냉장(4°C 이하)에서 서서히 해동하면 냄새와 육즙 손실을 줄일 수 있다.
USDA는 조리된 고기류의 냉동 한계를 2~3개월로 봤다. 가열 과정에서 세포가 이미 손상돼 재냉동 후 해동하면 수분이 빠지고 질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USDA는 "채소는 데친 후(blanching) 냉동해야 효소 작용을 억제할 수 있다"고 권장했다. 시금치·브로콜리는 10~12개월, 옥수수·완두콩은 8~10개월 보관이 가능하다. 달걀은 껍질째 냉동하면 부피가 늘어나 터지기 때문에, 흰자나 대체란 제품만 냉동을 권장하며, 이 경우 최대 1년까지 품질이 유지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음식물 쓰레기 중 30% 이상이 '유통기한 경과'로 버려진다. 식약처는 소비기한 제도와 냉장·냉동 관리가 정착되면 연간 음식물 쓰레기 발생량을 약 20% 이상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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