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액, 십중팔구 재량으로 산정…"법원이 기술 이해도 있나"[中企 기술탈취의 늪]③

<3>손해액, 십중팔구 재량으로 산정…"법원이 기술 이해도 있나"

솔컴, 8년간 소송 끝에 손배액 2000만원
피해 회복 못 하고 회사 문 닫아

기술탈취로 인한 피해액 입증 힘들어
손해액 81%가 법원 재량으로 결정

전문 분야 분쟁 늘면서 법원 불신도
"소프트웨어 가치 산정 빠져 의문"

편집자주기술을 빼앗긴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은 이겨도 져도 상처만을 남길 뿐이다. 승소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도 어렵거니와, 가까스로 통과하더라도 손해배상액이 터무니없이 적어 사업을 접는 일이 부지기수다. '기술을 빼앗겼다면 운이 없었던 걸로 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낫다'는 불문율은 그래서 생겨났다. 아무리 잘 싸워도 이기기 어렵고, 이겨도 지는 것과 다름없는 이런 싸움이 연간 300건 정도 벌어진다. 아시아경제는 총 5회에 걸쳐 중소기업을 파탄으로 내모는 기술탈취의 현황과 원인을 살펴보고 대안을 모색한다.

버거운 소송 비용, 터무니없는 배상액. 기술을 탈취당한 중소기업들이 법정 다툼에 나서길 꺼리는 주요 이유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기술침해 손해배상소송에서 법원이 인정한 평균 손해액은 1억4000만원으로 원고가 청구한 평균 금액(8억원)의 17.5% 수준에 머문다.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인 솔컴인포컴스(솔컴) 고시현 대표의 사례가 이런 문제를 잘 보여준다. 솔컴은 2011년 코오롱 계열사인 코오롱베니트로부터 프로그램을 개발해달라는 하청 제안을 받았다. 솔컴이 개발에 성공하고 거래가 차질 없이 이어지고 있던 시기, 코오롱 측은 돌연 다른 업체를 통해 납품하겠다며 솔컴 측에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이후 고 대표는 코오롱베니트가 자신이 공들여 개발한 소스 코드를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송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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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대표는 8년간 4번의 민사소송과 3번의 형사소송에 매달렸다. 소송에만 수억 원을 썼고 건강도 급격히 나빠졌다. 재판부는 최종적으로 코오롱의 저작권법 위반을 인정하며 솔컴 측에 손해배상금 2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했다. 힘들게 얻은 승리였지만, 솔컴은 결국 문을 닫았다. 고 대표는 "손해배상금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며 "이런 식이라면 누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소송에 나서겠느냐"고 반문했다.

가치 산정 어려워 결국 '법원 재량'에

손해배상액은 어떻게 정해질까. 24일 중소기업계와 법조계 등에 따르면 법원이 기술탈취 사건에서 손해액을 산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은 ▲기술 탈취로 인해 놓친 이익(일실이익) ▲탈취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침해자 이익) ▲사용 허락을 받았더라면 지급했을 사용료(실시료) 등이다. 만일 이 세 가지 방식을 통해 산정이 불가능하다면 재판부가 사실상 자의로 결정하는 '상당한 손해액'을 통해 마무리된다.

중앙대 대학원 융합보안학과 연구진의 '통계적 판례 분석에 기초한 기술 침해 손해배상 제도 연구' 논문에 따르면 국내 기술탈취 분쟁에서 손해배상액은 대부분 재판부의 자의적인 결정인, 상당한 손해액(80.7%)을 통해 결정된다. 피해기업이 재판부를 설득할 만한 객관적이고 공신력 있는 자료를 제시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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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롯데헬스케어와 기술탈취 분쟁을 겪었던 정지원 알고케어 대표는 "만약 기술 탈취로 인해 매출이 10억원에서 5억원으로 줄었다고 해도 이게 시장 상황 변화 때문인지 서비스가 안 좋아졌기 때문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며 "손해액을 입증하라는 것 자체가 손해배상은 안 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재단법인 경청 박희경 변호사는 "탈취 기업은 '우리가 벌어들인 이익이 해당 기술로 인한 것이 아니다'고 주장하면 된다. 탈취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에 해당 기술이 실제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를 증명하기는 매우 어렵다"며 "객관적인 논리를 통해 재판부를 설득하기 어렵다 보니 법원이 원고의 주장보다 훨씬 보수적인 태도로 배상금을 책정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 분야 분쟁 증가…"법원 못 믿어"

기계·화학·IT 등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의 기술탈취 분쟁이 늘면서 재판부의 임의 산정에 대한 불신도 높아진다.


육축 구동장치 시뮬레이터를 개발한 박선태 썬에어로시스 대표는 2018년 현대로템이 하도급 비용을 충분히 지급하지 않고 기술을 임의로 사용했다며 법적 분쟁을 시작했다. 법원은 1심에서 현대로템이 썬에어로시스가 개발한 하드웨어의 비용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사용했다는 점을 인정해 4억3000만원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박 대표가 연구개발비에 투자한 비용을 고려하면 부족한 수준이었다.

박 대표는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의 가치를 제대로 산정해달라고 2심 재판부에 요구했으나, 법원은 1심 결과마저 뒤집고 2심에서 썬에어로시스의 패소를 알렸다. 소프트웨어에 대한 가치 산정은 '경제적·독립적 가치를 산정할 필요성이 낮다'는 이유로 역시 배제됐다. 박 변호사는 "시뮬레이터의 핵심은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인데, 경제적 가치 산정의 필요성이 낮다고 본 재판부의 판결이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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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대표 역시 재판부의 손해액 산정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코오롱 측의 복제권 일부 침해를 인정했는데, 침해한 파일이 46개 라이브러리 파일 가운데 2개에 불과하다는 점 등을 들어 2000만원 손해액 판결을 내렸다. 파일 개발의 핵심인 소스 코드에 탈취에 대한 가치 산정이 빠지고 단순 비율로 평가된 셈이다.


고 대표는 이렇게 토로했다. "1000만원인 자동차에서 엔진이 20%를 차지하는데, 엔진만 뺏어갔으니까 200만원 주겠다는 이야기예요. 자동차를 설계하고 디자인한 시간과 노력(소스 코드)이 가장 큰 부분인데, 이를 고려하지 않은 게 가장 억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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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 기자 daw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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