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끝 시작한 소송은 또다른 '지옥'[中企 기술탈취의 늪]②

<2>고민 끝 시작한 소송은 또다른 '지옥'

기술탈취 피해에도 주변서 소송 만류
피해 기업 44% "아무 조치 안 했다"

소송 들어가면 '문제 있는 기업' 낙인
거래 끊기고 투자금 막히면 치명적

소송 시작해도 피해 입증 어려워 좌절
1심까지 평균 1년 이상…중도 포기도

편집자주기술을 빼앗긴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은 이겨도 져도 상처만을 남길 뿐이다. 승소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도 어렵거니와, 가까스로 통과하더라도 손해배상액이 터무니없이 적어 사업을 접는 일이 부지기수다. '기술을 빼앗겼다면 운이 없었던 걸로 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낫다'는 불문율은 그래서 생겨났다. 아무리 잘 싸워도 이기기 어렵고, 이겨도 지는 것과 다름없는 이런 싸움이 연간 300건 정도 벌어진다. 아시아경제는 총 5회에 걸쳐 중소기업을 파탄으로 내모는 기술탈취의 현황과 원인을 살펴보고 대안을 모색한다.

실내 환기시설을 제조하는 중소기업 A사는 5년 전 중견기업 B사로부터 4억원 규모의 설비 시공을 의뢰받았다. A사는 기존 환기시설 대비 전력 소모를 30%가량 줄이고 소음을 최소화한 기술로 특허까지 보유한 기업이었다. B사는 내부 투자 심사에 필요하다며 A사에 상세 도면이 포함된 기술 자료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A사는 시뮬레이션 분석 자료 등 모든 기술 자료를 넘겼으나, 얼마 뒤 B사로부터 '예산 문제로 인해 계약을 보류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A사의 대표였던 윤모씨는 "계약을 성사하기 위해 자료 제출을 거부할 수 없었다"고 했다. 1년 뒤, 윤씨는 자사 시스템과 유사한 제품을 B사의 계열사가 출시해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큰 충격과 배신감을 느꼈지만, 윤씨는 고민 끝에 소송을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윤씨는 "법무팀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업무를 제쳐두고 소송에만 매달릴 수가 없었다"며 "주변에서도 '이기기 매우 힘들뿐더러 혹여나 패소하면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고 만류했다"고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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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기업 절반은 "아무런 조치도 안 했다"

중소기업들에 기술은 '피'같은 자산이지만, 기술 탈취에 법적으로 대응하는 문제를 두고 업계에선 '그냥 참아야 한다'는 정서가 마치 공식인 것처럼 여겨진다. 소송에서 이기든 지든 중소기업 입장에선 얻는 것보다 잃는 게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소송이 시작되면서부터 중소기업은 거래 관계가 끊길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매출의 절반가량이 일부 대기업에 집중된 구조에서 거래 단절은 회사의 존폐를 좌우할 만큼 치명적이다.

벤처·스타트업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업계에 부정적인 소문이 퍼져 '문제 있는 기업'으로 낙인찍히는 순간, 기업의 생명줄인 '투자금'이 막힌다. 재단법인 경청 박희경 변호사는 "피해 기업들은 정당하게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 것이지만 사건이 이슈화되고 업계에 소문이 돌면 다른 기업들도 해당 기업과 계약 관계를 맺는 걸 꺼릴 것"이라며 "계약을 수주하고 투자를 유치해야 하는 중소기업 입장에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사업상 나은 판단이라고 여길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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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렇다 보니, 피해 중소기업의 절반가량은 기술을 빼앗기고도 속수무책이다. 2023년 중소기업중앙회가 실시한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정책 수요조사' 결과에 따르면 특허를 보유한 중소기업의 10.7%가 '기술탈취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는데, 이들 기업의 43.8%가 '별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피해 입증 어려워 '장기전'으로…중도 포기 수두룩

용기 내 소송을 시작하더라도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 피해 중소기업이 기술 탈취 사실을 입증하기가 매우 어려워서다. 기술 탈취 행위의 증거 대부분은 상대 기업의 사업장과 업무상 데이터에 존재하는데, 여기에 피해 기업이 접근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법원을 통해 자료 제출을 요구하더라도 '자료가 없다'거나 '영업상 비밀'이라는 이유로 끝까지 제출을 거부하면 사실상 강제할 방법이 없다.


박 변호사는 "지금껏 피해 기업들을 변호하면서 현행법상 존재하는 모든 문서 제출 명령을 다 해봤는데도 불구하고 침해 제품을 받아본 적이 없을 만큼 접근이 어렵다"며 "설령 증거 필요성에 대해 충실히 소명해서 법원이 겨우 허가를 내렸더라도, 상대 기업이 즉시 항고하면 본 사건과는 별개로 고등법원에서 자료 제출건으로 또 다퉈야 하는 상황이 온다. 이렇게 소송이 1년 이상 걸리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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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한 입증 과정으로 소송이 '장기전'으로 돌입하면 중소기업은 훨씬 더 불리해진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소송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현금 흐름이 막히면서 사업에도 차질이 생겨서다. 중소벤처기업부가 발간한 '2024 기술보호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기술탈취 1심 판결까지 걸리는 기간은 평균 1년 이상이었고 중소기업 승소율은 32.9%에 불과했다. 이렇다 보니 본안 소송에 들어가기 전 단계에서 소송을 취하하거나 1심에서 중도 포기하는 기업도 상당수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대기업이 일종의 '시간 끌기 작전'을 쓰며 소송을 끌고 가면 중소기업은 버틸 재간이 없다"며 "지면 모든 소송 비용을 떠안고 망할 테고 이겨도 거래처와의 관계 파탄으로 계약이 끊길 텐데, 우리 입장에선 '그저 참는 게 답'이란 말이 맞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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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 기자 daw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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