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실리콘밸리 중심지 팰로앨토. 휼렛패커드(HP) 본사와 포드 연구소가 자리한 그곳에는 주말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불야성' 같은 사무실이 있다. 바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이끄는 xAI 본사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21일 '극한의 근무 문화'가 일상화된 xAI의 사례를 소개하며 실리콘밸리의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사이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어지는 '주 6일 근무'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른바 '996'이라 불리는 중국식 기업 문화로 오전 9시 출근·밤 9시 퇴근·주 6일 근무를 뜻하는 신조어다. 이 용어는 2010년대 후반 중국 IT업계에서 널리 퍼진 근무 형태로,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가 이를 '축복'이라 옹호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불법 노동'으로 규정돼 중국에서는 법으로 금지되기까지 한 이 문화가 복지와 자유로운 분위기의 상징인 실리콘밸리에서 되살아난 셈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구글·아마존 같은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를 키워낸 극한 노동 문화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며 "AI 경쟁이 뜨거워지면서 실리콘밸리와 뉴욕의 스타트업들이 '996'을 미덕처럼 내세우며 극한의 속도전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장시간 노동 관행은 머스크 기업만의 일은 아니다. 실리콘밸리의 생성형 AI 스타트업 다수가 이 같은 근무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 핀테크(금융+기술) 기업 램프(Ramp)가 올해 1~8월 기업카드 결제 자료를 분석한 결과, AI 기업이 밀집한 샌프란시스코에서 토요일 오후 결제 건수가 전년 대비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닛케이는 이를 주말 근무 확산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전했다.
공개적으로 장시간 근무를 장려하는 기업들도 있다. 마티 카우사스 파일런 CEO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위대한 회사를 만들 수 없다"며 "나와 공동창업자는 더 오래 일한다. 강요하지는 않지만 직원 중에도 '996'으로 일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996 근무'를 미덕으로 여기는 경영자들의 이면에는 미·중 간 AI 패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자리하고 있다. 미국 테크 기업 경영자들은 "방심하면 중국에 AI 개발 주도권을 빼앗긴다"며 '996'을 경쟁의 상징처럼 언급하는 일이 늘고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중국의 문화는 996이며, 우리의 경쟁 상대는 탐욕스럽고 빠르며, 매우 강력하다"고 언급했다. 에릭 슈밋 전 구글 CEO도 "중국에서는 불법이든 아니든 모두가 996으로 일하고 있다"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공 보상형 근로 구조가 이런 문화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들은 AI를 활용해 소수 인원으로 빠른 성장을 추구한다. 그만큼 1인당 업무 강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닛케이는 "AI 개발 경쟁에 수조 달러가 투입되며, 성공 시 얻을 수 있는 금전적 보상이 거대하다는 점이 근로 강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이런 극단적 노동의 결말은 번아웃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경고도 나온다. 디디 다스 멘로 벤처스 투자자는 "장시간 근무는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경험 많은 인재일수록 이런 문화를 기피한다"며 "이런 문화를 미화하는 창업자 대부분은 젊다. 성숙한 창업자라면 40~50시간 근무로도 80시간보다 훨씬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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