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물건을 사는 시대가 아니라 구독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음악, 영화, 책은 물론이고, 커피·옷·자동차까지도 구독의 대상이 되었다. 클릭 한 번이면 결제되고, 또 다른 클릭 한 번이면 해지된다. 처음엔 세상이 놀랍도록 단순해진 듯 보였다. 그러나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말은 곧 쉽게 붙잡히는 구조를 뜻한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서비스를 구독하면서, 점점 더 깊이 그 안에 머물게 됐다. '구독 피로'라는 단어가 등장한 이유다. 미국에서는 이미 구독 해지를 대신해주는 스타트업이 생겨났고, 그 서비스조차 또 다른 구독 형태로 운영된다. 이제는 구독을 줄이려면 또 다른 구독을 해야 하는 역설의 시대다.
기술은 언제나 편리함으로 시작해, 결국 새로운 의존을 만든다. 한때 구독은 소유의 부담을 덜고, 원하는 만큼만 이용하며, 자원을 절약할 수 있는 합리적 모델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의 구독은 자유라기보다 습관이 되었다. 그 습관은 플랫폼이 설계한 관계망 속에서 자라난다. 매달 자동으로 빠져나가는 구독료는 단지 비용이 아니라 결속의 신호다. 문제는 그 결속이 자발적이라기보다 구조적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구독 문화는 이 구조를 다른 방식으로 내면화했다. 미국에서는 해지의 피로를 말하고, 한국에서는 관리의 피로를 이야기한다.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편리함이 만들어낸 같은 피로다.
한국에서는 이런 불편을 줄이려는 통합 구독 서비스가 빠르게 퍼지고 있다. 한 번의 결제로 여러 콘텐츠를 보고, 포인트를 쌓고, 멤버십 혜택을 통합 관리한다. 소비자는 덜 번거로워졌지만 동시에 한 플랫폼 안에 더 단단히 묶였다. 편리함이라는 명목 아래 관계의 자율성이 줄어든 셈이다.
우리는 더 이상 브랜드를 고르는 게 아니라 생태계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생태계 안에서 선택의 자유는 점점 형식적인 것이 되어간다.
이 변화는 단순한 비즈니스 모델의 문제가 아니다. 그 밑바탕에는 소유에 대한 철학의 이동이 있다. 과거의 소유는 개인의 경계였다. 물건은 내 것이고, 그것은 나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구독의 시대에 '내 것'이라는 개념은 점점 희미해졌다. 이제 우리는 물건이 아니라 연결로 자신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 연결은 언제나 조건부다. 구독은 관계를 이어주지만, 그 끝을 정하는 것도 시스템이다. 그래서 구독은 편리함과 불안이 함께 묶인 감정의 계약처럼 느껴진다.
이런 점에서 구독 경제는 단순한 소비 트렌드가 아니라 현대인의 존재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이다. 우리는 물건을 가지지 않는 대신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존재가 됐다.
플랫폼은 사용자의 이탈을 막기 위해 혜택과 포인트를 던지고, 사용자는 그 안에서 작은 성취감과 소속감을 느낀다. 그렇게 결속은 기업이 설계한 감정의 체계로 변한다. 편리함은 우리의 시간을 절약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감정까지 데이터화한다.
구독은 더 이상 소비 행위가 아니라 감정의 유지비다. 그래서 구독 피로는 단순히 결제 피로가 아니다. 너무 많은 연결, 너무 잦은 갱신, 너무 쉽게 잊히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진짜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구독은 소유의 시대를 지나 관계의 시대를 열었지만, 동시에 관계의 과잉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콘텐츠를 구독하는 것이 아니라 안정감과 안심감을 구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달 결제가 갱신될 때마다 '나는 여전히 연결돼 있다'는 신호를 확인하면서 말이다. 지금 필요한 건 구독을 줄이는 일이 아니다. 진짜 필요한 건 무엇을 계속 이어갈지 스스로 결정하는 판단이다. 기술이 소유의 부담을 덜어줬다면, 이제는 관계의 방향을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모든 것이 자동으로 갱신되는 시대에 중요한 건 끊을 용기가 아니라 이어갈 이유를 스스로 묻는 일이다. 결국 구독 피로의 시대에 남는 건 결제 내역이 아니라 나에게 의미 있는 관계를 가려내는 힘이다.
손윤석 미국 노터데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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