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또 무산된 佛연금개혁…'3.6兆 청구서' 날아온다

국민 70% 반대 속 결국 마크롱 백기
개혁 철회 대가는 늘어난 정부 부담
S&P, 국가신용등급 한 단계 낮춰 'A+'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프랑스 총리가 지난 14일(현지시간) 파리 국민의회에서 연금개혁을 잠정 중단하겠다는 내용의 정책 연설을 마친 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프랑스 총리가 지난 14일(현지시간) 파리 국민의회에서 연금개혁을 잠정 중단하겠다는 내용의 정책 연설을 마친 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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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개혁을 2027년 대선 이후로 연기하는 방안을 의회에 제안하겠다. 지금부터 2028년 1월까지 정년 연장은 없을 것이다."(세바스티앵 르코르뉘 프랑스 총리)


프랑스 국민의 70%가 반대한다는 연금개혁이 약 2년9개월 만에 잠정 중단됐다. 이는 2022년 재선에 성공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내세운 핵심 공약이었다. 그는 사회보장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개혁이 불가피하다며 행정명령까지 동원했지만, 결국 전 국민적 반발과 야당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연금개혁 철회의 대가는 가볍지 않다. 프랑스 정부는 향후 2년간 약 22억유로(약 3조6500억원)의 추가 재정 부담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정부의 재정 건전화 노력에 깊은 의구심을 표하며 국가신용등급을 'A+'로 한 단계 낮췄다.


2019년 개혁 실패 후 또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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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프랑스의 법정 퇴직연령은 62세, 완전연금 수급을 위한 납부 기간은 42년이다. 마크롱 정부가 추진한 개혁안은 이를 2030년까지 64세와 43년으로 각각 늘리는 내용을 담았다. 2019년 추진했던 '단일 보편 연금제' 도입이 대규모 파업과 코로나19 등을 거치며 좌초된 뒤 엘리자베스 보른 전 총리 등과 손잡고 다시 내놓은 수정안이다.


통상 연금개혁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인기가 없는 정책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테리사 메이 전 총리와 앤디 번햄 그레이터 맨체스터 시장이 개혁을 시도했다가 반대 여론에 부딪힌 바 있다.

그럼에도 마크롱 대통령이 한결같이 개혁을 밀어붙인 이유는 단순한 정치적 의지가 아니라 재정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다. 프랑스의 연금 제도는 현세대 근로자의 기여금으로 퇴직 세대를 부양하는 '부과방식' 구조로, 정부 보조 없이는 유지가 어렵다.


파리 소재 싱크탱크 '세르클 드 르파르뉴'의 필립 크레벨은 "공공부문 연금에 대한 정부 지원이 없었다면 이미 제도는 적자로 전환됐을 것"이라며 실질적인 기금 고갈 위험을 지적했다. 실제로 정부 구상의 토대가 된 보고서를 발간한 연금전략위원회(COR)는 2039년부터 매년 최소 100억유로(약 16조6000억원)씩 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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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부채 역시 심각하다. 프랑스의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의 114%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 내 그리스·이탈리아 다음 수준이다. 르코르뉘 총리는 GDP의 5.8%에 달하는 1696억유로(약 282조원)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긴축 예산안을 통과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의 방위비 분담 확대를 요구한 것도 정부 부담을 가중시켰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프랑스의 연금지출은 GDP의 14.2%로, 유럽 평균(11.75%)보다 훨씬 높다. 이탈리아(16.1%), 오스트리아(14.5%) 다음으로 높은 수치다.


세계적인 저출산·고령화 추세 속에서 부양자들의 책임도 커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의 2022년 연금 수급자 100명당 기여자(근로자)는 142명이었지만 2040년에는 134명이 그 책임을 나눠 부담하게 된다. 근로자 1명당 부양 부담이 계속 커질 것이란 얘기다.


"나는 나의 연금을 사랑한다"

프랑스 국민들이 정부의 설명에 납득하지 못한 것은 연금은 프랑스 사회의 정체성과 직결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2023년 한 설문조사에서는 국민의 약 70%가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개혁에 반대한다고 답변했다.


파리 광장으로 나온 국민들은 독일 공영방송 도이치벨레(DW) 등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나의 연금을 사랑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연금은 단순한 복지제도가 아니라 삶의 안전망이라고 강조했다. 코로나19 이후 물가 급등으로 실질 소득이 줄어든 상황에서 개혁은 불안 심리를 더욱 자극했다.


프랑스인들이 현행 연금 제도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는 점은 개혁을 막는 족쇄가 됐다. OECD에 따르면 현재 프랑스의 65세 이상 가처분소득은 전체 평균과 거의 같고 노인 빈곤율은 3.6%로 유럽 최저 수준이다. 개혁 효과를 반영할 경우 2050년쯤 노년층의 상대 소득은 전체 평균보다 약 10% 낮아질 것으로 OECD 보고서는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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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안에 포함된 납부 기한 연장이 육체노동자나 저학력 근로자에게 불리하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일찍 노동 시장에 진입한 이들이 더 오래 일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정성' 논란이 야권과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불거진 것이다.


여기에 마크롱 정부의 감세 등 친기업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미카엘 젬무르 파리1대학 교수는 "연금제도는 이미 건전한 상태인데, 정부는 기업 감세로 생긴 재정 공백을 메우려는 목적이 크다"고 꼬집었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설득과 통합의 부재가 개혁 실패의 핵심 요인으로 지목된다. 마크롱 대통령은 헌법 49조3항(사회보장제도 등과 관련해 특정 다수당이 이를 반대할 경우 총리는 의회 표결 없이 법안을 즉각 통과시킬 수 있도록 헌법이 보장한다)을 활용해 의회 표결 없이 법안을 강행했으나 계속된 총리 불신임 속에서 큰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영국 가디언은 이를 두고 "프랑스의 거리는 다시 한번 민주주의의 무대가 됐다"며 연금제도가 단순한 재정 문제가 아닌 노동의 존엄과 사회 정의의 문제라고 총평했다.


설득의 문제, 선택의 문제

한때 성공한 모델로 여겨졌던 프랑스의 연금개혁 사례는 전 세계 각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도 국회가 18년 만에 연금개혁 논의를 재개했지만 미래세대의 부담을 두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한국고용복지학회가 발표한 '퇴직연금 제도 개선을 위한 가입자 인식조사'에서 국민연금의 지속 가능성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27.4%에 그쳤다.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더 많았고, 불신의 핵심은 '기금 고갈'이었다. 특히 20~40대의 신뢰도가 50대 이상에 비해 낮은 편이었다.


개혁 실패는 부메랑이 돼 돌아올 전망이다. 르코르뉘 총리가 연금지출 감축 대안을 마련해 내년 재정적자를 줄이겠다고 밝혔으나 시장의 의구심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다.


S&P는 지난 17일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한 단계 하향 조정했다. S&P는 "2026년 예산안이 의회에 제출됐지만 프랑스 정부의 재정에 대한 불확실성은 여전히 높다"면서 "올해 목표는 달성할 것으로 보이지만 상당한 추가 예산 적자 감축 조치가 없다면 재정 건전화는 이전 예상보다 느려질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앞서 또 다른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 역시 지난달 재정 적자 문제를 이유로 들어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한 단계 강등했다.


글로벌 투자은행(IB) UBS의 클라우디아 판세리 애널리스트는 "프랑스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2~3%포인트 더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며 "2026년에도 재정적자가 5% 이상으로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설에서 "온건한 개혁조차 정치적으로 불가능하게 된 현실은 프랑스 정치의 한계를 드러냈다"며 "개혁과 성장이라는 선택지가 사라진 상황에서 각 정당은 증세·산업정책·규제 강화 등 '누가 더 창의적으로 경제를 망칠 수 있는가'를 놓고 다투고 있다"고 질타했다.





차민영 기자 bloom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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