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이 중앙은행 간 체결하는 전통적 통화스와프 대신 '미국 재무부 외화 비상금'을 활용해 대미 투자금을 구성하는 방안을 최종 조율 중이다. 3500억달러의 대미 투자 과정에서 한국 원화를 담보로 미국이 달러 유동성을 직접 공급하겠다는 거다. 미국의 달러 공급 재원은 미 재무부가 운용하는 외환안정화기금(ESF)이다. 당초 한국은 한국은행이 미 연방준비제도(Fed)에 원화를 맡기고 달러를 빌려오는 방식의 중앙은행 간 무제한 통화스와프 체결을 제안했다. 하지만 Fed가 주체인 통화스와프는 법률상 책무를 뛰어넘어 투자 지원 방식의 스와프를 용인해줘야 하고, 만기도 1~3개월로 짧은 탓에 길게는 수년씩 이어질 투자 자금 조달에 적합하지 않다는 한계가 있었다.
ESF는 재무부가 외환시장 안정 목적으로 쌓아놓은 일종의 외화 비상금이다. 한국의 외국환평형기금과 유사한 개념으로, 미 Fed가 제공하는 통화스와프와 함께 대표적인 달러 유동성 지원 기금으로 꼽힌다. 전통적 통화스와프가 선진국 특히 달러·엔·유로화 등을 사용하는 기축통화국을 중심으로 한다면, ESF는 경제·외교적으로 긴밀한 외국 정부에 대한 통화 위기 대응 등에 활용돼왔다.
최근 아르헨티나와 체결한 200억달러 규모의 ESF 통화스와프가 대표적이다. 미 재무부는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에 ESF 자금을 활용해 긴급 유동성을 지원하고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이 달러 대출에 대한 담보로 페소화를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 불안이 미국 시장에 부정적 파급효과를 낳는 것을 차단함과 동시에 남미에서의 중국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작용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5일 저녁(현지시간)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 계기로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을 만나 대화하고 있다.(출처:기획재정부)
원본보기 아이콘과거 1995년 멕시코 페소 폭락 사태 당시에도 미국은 ESF를 통해 최대 200억달러의 유동성을 지원한 전례가 있다. 멕시코 페소화를 담보로 최대 90억달러를 빌릴 수 있는 단기 스와프와 5년 만기의 대출 등으로 구성됐다. 1998년 브라질에 국제결제은행(BIS) 보증 대출의 일부를 보증하는 다자간보증 형태로 50억달러를 지원한 적도 있다.
미국이 남미 국가들을 배려해 특별 대우를 해줬다기보다는 위기 시 달러 확보를 위한 미국 국채 투매 현상과 대규모 난민 유입 등으로 인한 위기 전이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ESF는 과거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Fed의 통화스와프와 함께 달러 부족에 시달리는 외국 은행들에 조용히 달러 유동성을 푸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ESF만으로 3500억달러의 유동성을 지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미 재무부 홈페이지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기준 ESF 자산의 잔액은 총 2209억5977만달러로, 부채(1775억6248만달러)를 뺀 순자산은 약 434억달러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양국은 ESF 외 다른 자금 조달 방안도 함께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장기간 투자를 요하는 사업의 투자 시기를 분산해 외환시장에 가하는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미 관세 협상을 이끄는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우리는 한국과의 무역협상을 마무리하는 단계"라며 "이견들이 해소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관건은 현금 투자 비중이다. 3500억달러 선불 지급 요구는 철회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금 투자 비중은 당초 우리 정부가 목표로 했던 5%보다는 더 커질 전망이다. 양측은 현금 투자 비중에 관해 이견을 좁히며 접점을 찾고 있다. 3500억달러 중 마스가 프로젝트에 투입하기로 한 1500억달러를 제외한 2000억달러를 트럼프 대통령의 남은 임기 3년 내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매년 660억달러를 조달해야 한다. 우리 정부가 조달할 수 있는 달러는 연간 최대 200억달러에 불과하다. 4220억달러(9월 말 기준)인 우리 외환보유액의 5% 수준이다.
미국을 방문 중인 한국 협상단은 16일(현지시간) 오후 백악관 예산관리국(OMB)을 찾아 마스가 프로젝트와 관련한 논의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양측 실무협상이 마무리되는 대로 이달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한미 정상이 양해각서(MOU)에 서명할 것으로 관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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