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기술 얹어 AI 펀드라도 받아야 할까요?"
국내 벤처투자 시장에 모처럼 훈풍이 불고 있지만 여전히 볕 들지 않는 곳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이오·의료 분야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초기 백신, 치료제, 진단기기 등에 대한 수요 폭증으로 투자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바이오·의료 스타트업들이 불과 4~5년 만에 투자 가뭄에 시달리며 고사 위기에 직면해 있다.
벤처투자 시장의 대기 자금은 AI 스타트업으로 빠르게 집중되고 있다. 정부와 민간이 물밀듯 쏟아붓는 예산 앞에서 벤처캐피털(VC)들은 AI 투자 전용 펀드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일부 대형 VC에서는 AI 투자금이 갈 곳을 못 찾아 쌓여 있을 정도다. 이렇다 보니 바이오 업계에서는 '당장 살아남으려면 AI 기술을 접목해 AI 펀드라도 받아야 한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트렌드를 민첩하게 쫓는 것이 벤처투자의 숙명이지만 지금과 같은 과도한 AI 투자 쏠림 현상은 지속적 투자가 필요한 또 다른 분야에 자금이 공급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이는 단순한 투자 시장의 관성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혁신기업들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잃는 것은 장기적으로 산업 경쟁력 저하라는 뼈아픈 결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벤처투자자는 투자 수익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위험을 감수하며 새로운 가능성의 싹을 발견·육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신기술 기반의 사회 문제 해결은 물론 혁신 문화 확산, 경제 전반의 경쟁력 강화에 기여한다. 현재 AI 붐 한가운데 있는 엔비디아가 과거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AI 기술에 대한 투자와 연구개발(R&D)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세쿼이아캐피털, 서터힐벤처스와 같은 실리콘밸리 대표 VC의 신뢰와 자금 지원이 있었다. AI 못지않게 롱텀 투자가 요구되는 분야들에 균형 있게 관심을 기울일 때, 모험자본으로서 벤처투자의 진짜 가치는 더욱 빛날 것이다.
한국의 높은 공공재원(모태펀드) 의존도를 고려할 때 정책 변화도 뒷받침돼야 한다. 모태펀드 출자 기조를 인기 분야인 AI에만 치중하지 않고 바이오·의료, 소재·부품·장비 등 성장 잠재력이 크면서도 장기적 투자가 필요한 분야에 할당하는 제도적 장치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단기적 수익이 아닌 장기 혁신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하는 정책 지표를 도입해 투자 정책과 자금 집행에 반영하는 것도 중요하다. 진정한 혁신은 균형 잡힌 시선과 지속 가능한 투자 환경에서 나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