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출범 이후 예정됐던 원자력 정책이 연달아 지연되고 있다. 원전이 정부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면서 업계의 불만과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26일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고준위방폐물특별법)이 시행됐지만, 관리위원회를 이끌 위원장 인사는 지난 10월 2일에서야 이루어졌다. 위원장은 국무총리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날 대통령실은 고준위방사성폐기물관리위원회 위원장(차관급)에 김현권 전 국회의원을 임명한다고 밝혔다. 대통령실은 김 위원장에 대해 "환경, 에너지 분야 기관 및 위원회 등에서 다년간 활동하며 전문성과 경험을 두루 갖췄고 정무적인 역량·소통 갈등 관리 능력을 입증한 점이 높게 평가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회적 갈등이 생길 수 있는 국가적 과제를 충분한 소통과 숙의를 통해 이끌어야 하는 만큼 초대 위원장으로서 사회적 대화와 공감대 형성을 성공적으로 해주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김 신임 위원장의 전문성에 대해서는 벌써 의구심이 제기된다. 김 위원장은 1964년생으로 충암고와 서울대를 졸업했다. 학생운동과 노동 운동으로 투옥 생활을 한 뒤 고향인 경북 의성으로 내려가 25년간 마늘 농사와 한우를 키우며 농민으로 생활했다. 의성마늘명품화사업단장, 의성한우협회 회장을 지냈다.
2016년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돼 20대 국회에 입성했으며 농업 분야 전문성을 살려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 원자력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지만 에너지 관련한 김 위원장의 경력은 2021년 개원한 경기환경에너지진흥원 초대 원장이 거의 전부다. 임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그의 배우자다.
고준위방폐물특별법은 현재 원전 내 임시 저장시설에 저장돼 있는 사용후 핵연료(고준위 방폐물)가 2030년부터 포화됨에 따라 중간저장시설과 영구처분장을 시급히 마련할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제정됐다. 관리위원회는 앞으로 기본계획 수립부터 부지선정, 주민 의견 수렴, 사회적 갈등 해소 등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관리위원회는 또한 환경부에서 확대 개편해 원전 정책을 맡게 된 기후에너지환경부, 현재 경주의 중저준위 방폐장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원자력환경공단과도 업무를 조정하고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원자력계는 관리위원회에 벌써 요구사항을 내놓고 있다. 한국원자력학회는 관리위원회 출범에 앞서 지난달 25일 재활용을 포함한 국가 사용후 핵연료 정책을 조속히 수립할 것, 원전의 안정적 운영을 저해하는 특별법의 독소조항을 즉각 개정할 것, 태백 지하연구시설(URL) 부지의 기술적 논란을 투명하게 해소할 것 등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고준위방폐물관리위원회는 위원장 1명, 상임위원을 포함해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위원 8명 중 4명은 위원장이 제청해 대통령이 임명하고, 나머지 4명은 국회 추천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게 돼 있다. 위원회 사무처에는 사무처장 1명과 하부조직으로 기획소통과, 부지선정과, 기반조성과 등 정원 35명으로 이뤄진다. 정부는 기존 산업통상자원부의 김대일 원전산업정책과장을 사무처장으로 내정하는 등 사무처 인사를 진행하고 있다.
원전 계속 운전은 이재명 대통령도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새 정부 들어서도 큰 무리없이 추진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지난 25일 고리2호기 계속운전 여부를 심의했던 원안위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다음 회의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고리2호기 사고관리계획서 승인안과 고리 2호기 계속운전 허가안이 동시에 안건으로 올라왔다. 두 안건은 별건이지만 사고관리계획서와 계속운전 주기적 안전성 평가(PSR)간 방사선환경영형평가의 정합성을 맞추기 위해 이날 동시에 상정됐다.
원안위 일부 위원들은 온종일 사고관리계획서만 심의하느라 정작 계속운전은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종료됐다. 사고관리계획서도 자료를 보완해 재상정하기로 했다.
사고관리계획서는 2019년 6월 한국수력원자력이 원안위에 제출한 뒤 6년간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의 안전성 심사와 총 6회의 원자력안전전문위원회 사전 검토까지 마쳤다. 그럼에도 이날 더불어민주당이 추천한 일부 위원은 세부적인 내용까지 파고들며 문제를 제기했다.
수십명의 전문가들이 수년간 검토를 마친 사안에 대해 원안위 위원들이 일일이 지적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날 한 동료 위원도 "KINS와 전문위 검토까지 마쳤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언급할 정도였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분과별로 전문가들까지 검토한 사안을 위원회 회의에서 다시 논의하겠다는 것은 위원회 조직 성격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차기 회의에 안건이 상정되어도 통과는 장담하기 어렵다. 이달 중 원안위 위원중 3명의 임기가 종료되기 때문에 제대로 논의가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많다. 12일에는 국민의힘 추천인 김균태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박사, 제무성 한양대 교수, 24일에는 더불어민주당 추천 위원인 박천홍 전 한국기계연구원 원장이 임기가 종료된다. 원안위 사무국 관계자는 "지난 회의 분위기를 봐서는 사고관리계획서를 다시 올린다 해도 통과가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신규 원전 건설은 더욱 암담한 상황이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기자간담회에서 공론화 필요성을 제기한 데 이어 이재명 대통령까지 나서서 "15년 걸리는 원전보다 재생에너지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올해 하반기 신규원전 부지 선정을 위해 지자체를 대상으로 공모에 착수할 계획이었으나 현재 관련 절차가 중단된 상태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