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 규정 전면 재정비…"민생 발목잡는 과잉형벌 줄인다"

정부가 각종 법령에 산재한 형벌 조항을 대대적으로 손질한다. 배임죄 등 기업 경영이나 신산업 도전을 위축시키는 것과 경미한 의무 위반 등 서민·자영업자들에게 불합리한 부담을 안겨 온 것 등의 '과잉형벌'을 줄여 민생과 경제 활력을 되살리겠다는 취지다.


정부와 여당은 30일 당정협의회를 개최하고 '경제형벌 합리화 1차 방안'을 발표했다. 이번 조치는 지난 7월 이재명 대통령이 비상경제점검 태스크포스(TF) 회의에서 "과도한 경제형벌로 기업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신속하게 경제형벌 합리화 방안을 마련하라"라고 주문한 데 따른 것이다.

이후 법무부와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고용노동부 등 관계 부처는 합동 TF를 꾸려 각종 법령을 전수 검토했다. 그 결과 총 110개 법률의 형벌 조항을 개선 대상으로 분류했다. 단순 실수·경미 위반에 대해서까지 형사처벌을 규정하거나, 신산업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 구시대적 조항이 다수 포함됐다.


정부는 형벌 규정 정비 과정에서 ▲형벌은 최후수단 ▲균형성과 형평성 확보 ▲현실과 합리성 반영 ▲경제활동 지원 ▲민생 보호 등 5가지 원칙을 마련했다. 동일 효과가 가능하다면 행정제재나 민사적 수단을 우선 적용하고, 서민·자영업자에게 불필요한 형사 리스크 전가를 방지하겠다는 취지다. 특히 불법 이득 추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은 행위, 고의성이 없는 실수 등에 대해서는 처벌 강도를 완화하거나 아예 형벌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TF 당정협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5.9.30 김현민 기자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TF 당정협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5.9.30 김현민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

경영 판단 위축시키는 배임죄 정비

정부가 주목한 첫 번째 유형은 기업 경영 활동을 위축시키는 형벌 규정이다. 대표적 사례가 '배임죄'다. 현행법상 회사 경영진이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더라도 손실이 발생하면 배임 혐의로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배임죄의 요건이 추상적이고 적용 범위가 넓어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위축시킨다는 지적이 지속해서 제기된 바 있다.


이 때문에 기업은 과감한 투자나 신산업 진출에 주저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국내 대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 집행 과정에서 기술 실패가 곧바로 경영진의 형사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정부가 최근 5년(2020~2024년) 배임죄 1심 선고 판례 약 3300건을 분석한 결과 기업영역에서 가장 많이 적용했고, 그 외에도 공공 및 민사 영역까지 광범위하게 적용하고 있었다. 또 기업과 무관한 민생분야, 사업기회 유용, 가상화폐 범죄 등에도 배임죄를 적용 중이다.

정부는 이러한 규정을 완화해 고의가 없고 합리적 경영 판단에 따른 결과라면 배임으로 처벌하지 않도록 범위를 조정하기로 했다. 다만 임직원의 법인자금 사적 사용, 영업비밀 유출 등 기업의 이익을 저해하는 행위는 여전히 배임죄 처벌이 필요하다고 봤다. 정부 관계자는 "자율성과 예측 가능성을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중요 범죄에 대한 처벌 공백이 발생하지 않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서민·자영업자 잡는 형벌 줄인다

민생경제 활동을 과도하게 위축시키는 규제도 개선한다. 경미한 의무위반에 대해선 형벌 대신 과태료로 전환해 불필요한 전과자 양산을 막겠다는 취지다. 예컨대 트럭 적재함 크기 변경 시 현행 징역 1년, 벌금 최대 1000만원 등을 부과하지만 앞으로 형벌을 폐지하되 과태료 최대 1000만원 및 원상복구 명령을 내리기로 했다.


또 미용실 등 공중위생영업 시 상호명 변경신고를 하지 않은 경우 현행 징역 최대 6개월, 벌금 최대 500만원에서 과태료 최대 100만원으로 개정한다. 근로계약 체결 시 종사업무 등 단순명시 사항을 명시하지 않은 경우에도 현행 벌금 최대 500만원에서 과태료 500만원으로 전환한다. 정부는 의무위반에 따른 형벌부과는 주로 소상공인 등 국민부담이 큰 생활밀착형 과제인 만큼, 향후 과제를 적극 발굴해 나갈 방침이다.


형벌을 완화하는 대신 금전적 책임성은 강화한다. 예컨대 현행 선주상호보험조합법에 따르면 조합 임원 등이 법령을 위반해 조합 이익을 특정인 등에게 부당하게 배당한 경우 징역 최대 7년, 벌금 최대 7000만원을 부과하지만, 앞으로 징역 최대 3년, 벌금 최대 3000만원을 부과한다. 대신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손해액의 2배 이내)을 도입한다.


선(先)행정조치, 후(後)형벌부과로 전환한다. 형벌 필요성이 있더라도 시정명령·원상복구 명령 등 행정제재·계도를 통해 입법목적 달성이 가능한 경우에 해당한다. 공정거래법에 따라 시장지배적사업자가 상품 가격 등을 부당하게 결정하는 경우 시정조치명령 후 형벌을 부과키로 했다. 현행 징역 최대 3년, 벌금 최대 2억원 부과에서 시정조치명령 부과 후, 이를 불이행 시 형벌 부과하는 조항만 유지한다. 페인트 제조업체 등이 정기검사를 받지 않고 유해화학물질 취급 시설(보관창고) 운영 시 개선명령 부과 후 형벌을 부과하고, 대기업 등이 서점업 등 생계형 적합 업종을 인수·개시·확장한 경우, 항만시설을 허가 없이 임대한 경우 등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이번 개선 대상으로 삼은 형벌 규정 총 110개 외에도 1년 내 전 부처 소관 법률 중 형벌 관련 규정 30%를 정비하겠단 목표다.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 TF 단장은 "과도한 경제 행동 규제와 기업의 창의적 혁신을 저해하고 투자 결정을 방해해 민생경제 활력을 지나치게 옥죄고 있다는 문제 인식을 당정이 공유했다"며 "형벌 만능주의를 줄이고 민사 책임 강화를 통해 피해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이동우 기자 dwlee@asiae.co.kr
이기민 기자 victor.lee@asiae.co.kr
황서율 기자 chestnut@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