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억달러를 3년 안에 전액 현금으로 투자하라는 미국의 비현실적인 요구에 우리 정부가 '무제한 통화스와프' 체결을 역제안했다. 미국과의 무제한 통화스와프 체결은 확실한 '달러 우산' 아래 들어가는 것이지만, 미국이 그 우산을 아무에나 내주지 않는다. 기축통화국에만 통화스와프를 제공한다는 원칙 아래 유럽연합(EU), 영국, 스위스, 캐나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일본만이 그 우산 아래 들어가 있다. 한국은 비기축통화국으로 아직 그 반열에 올라 있지 않다. 글로벌 무역결제에서 원화 거래 비중도 1% 미만으로 미미해 통화스와프 체결에 따른 실익이 매우 낮다는 게 미국의 입장이다.
연합뉴스
한국은행 외환보유액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지난달 말 기준 4162억9000만달러(약 587조원)다. 3500억달러 대미투자액은 외환보유고에 육박한 규모다. 미측 요구를 그대로 수용해 3500억달러를 일시납으로 송금한다면 전체 외환보유액의 84%가 빠져나가게 된다. 국제통화기금(IMF) 등이 권고하는 적정 보유액 하한선(4700억달러)의 14%도 못 미친다. 과거 1997년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8년간 탄탄하게 쌓아 올린 외환방어벽을 대미 투자로 하루아침에 허무는 셈이다.
외환당국은 외환보유액 감소를 초래하지 않는 방식으로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이 연간 200억달러(민간 부문 포함) 수준인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한국이 3500억달러를 외환시장에서 조달하려고 할 경우 현재 1410원까지 뛴 환율이 2000원대로 치솟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소규모 개방경제에 외환 건전성이 흔들리면 국가 신인도가 떨어지고 제2 외환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국가 간 통화스와프는 통상적으로 두 나라의 중앙은행이 서로의 통화를 맞교환하는 계약이다. 한국은행과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통화스와프를 체결한다면 한은이 연준 금고에 원화를 맡기고 달러를 빌려오는 식이다. 한국은 2008년 300억달러, 2020년 600억달러 한도의 통화스와프를 미국과 체결해 글로벌 금융위기와 팬데믹 위기를 넘겼다. 이때 맺은 통화스와프는 기본 약정기간이 6개월로, 만기연장을 통해 1년3개월~1년9개월 유지됐지만, 실제로 빌려쓴 기간은 초단기였다. 위기 시 초단기로 공급받던 달러를 3500억달러 대미 투자 과정에서 길게는 수년, 수십년씩 공급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게 우리 정부의 요구인 것이다.
이같은 '투자 지원 목적의 통화스와프'는 전례없는 형태다. 투자 지원 목적의 통화스와프는 달러 유동성을 준다는 것 외에는 전통적인 방식의 통화스와프는 전혀 다른 형태가 될 것으로 관측된다. 짧아도 몇 년 길게는 수십년씩 이어질 투자 자금 조달에 적합한 방식을 고려하는 것이다. 다만 한국과 투자 지원형 통화스와프를 체결하게 되면 다른 관세 협상국들에도 이를 허용해줘야 하는 상황인만큼 미국측이 큰 부담을 느낄 것이라는 점이 변수다.
막대한 이자비용은 우리측 부담이다. 현재 통화스와프 수수료는 통화스왑금리(OIS)에 25bp 가산금리를 붙인 연 4.5%로, 크게 높다. 극단적으로 3500억달러 전액을 빌려온다고 가정하면 연간 금융비용은 150억달러(약 21조원, OIS+25bp)에 달한다. 1000억달러만 빌려와도 연 45억달러(약 6조3000억원)다. 상호관세 25%를 맞았을 때 2024년 실질 국내총생산(GDP) 기준 손실액 추정치 연간 7조~9조원(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맞먹는 금액이다. 통화스와프 이자비용이 작지 않은 만큼, 향후 협상 과정에서 관세 인하율과 대미 투자 구조와 실행 방식, 외화 유동성이 시장에 미칠 영향 등 손익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고려될 것으로 보인다.
조선업 협력을 비롯한 미측의 이해관계를 감안할 때 달러 유동성 확보를 위한 제안적 통화스와프 체결이 수순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은 그동안 통화스와프 체결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해왔다. 최근 아르헨티나 정부에 200억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선제안한 것도 중국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이유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동향분석팀장은 "향후 체결된 전체 딜에 따라 통화스와프 체결 기간과 구조 등은 달라질 수 있다"면서도 "관세협상 과정에서 보증·대출 투자 비중을 높이고 상업적 합리성을 확보하면서 통화스와프 약정기간을 10년 이상으로 늘려야 할 것"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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