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임윤아가 1년 가까이 칼을 잡았다. 드라마 '폭군의 셰프'를 위해서다. 미슐랭 3스타 셰프 연지영 역할이었다. 칼질과 불 조절을 익히고 재현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반죽을 치대고 국물을 끓이는 행위까지 능숙해야 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자기만의 해석이다.
촬영장에서 그는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맞닥뜨렸다. 명나라 사신 우곤을 맡은 김형묵이 연지영의 음식을 맛보며 보여준 리액션이었다. "온몸으로 맛있다는 표현을 하실 때 눈이 마주쳤어요. 우리 드라마 맞나 싶을 정도로 놀랐죠." 컴퓨터그래픽(CG)이 더해지기 전이었다. 배우의 표정만으로도 음식의 위력이 전달됐다. "또 새로운 표현이 나오나 기대하게 되더라고요. 맛보는 리액션이 있어야 연지영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나타나는 거니까요."
그 순간 임윤아는 깨달았다. 자신의 연기에 '허용 범위'가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톤을 잡는 과정이 있었다. "제 에너지를 다 쏟으면 연지영이 혼자만 밝아 보일 수 있잖아요. 조선 시대에 적응 못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고." 장태유 감독은 오히려 격려했다. 계속 대비되니까 재미있다고. 실제로 상대 배우들이 과감한 리액션을 보여주면서 임윤아의 연기는 점차 에너지를 얻었다. 요리 대결을 벌이면서 연지영의 캐릭터가 더 생생해진 건 우연이 아니었다.
"같은 재료라도 요리하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 같은 대본도 배우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와요. 손맛이 다르듯 연기도 각자의 해석이 있는 거죠. 그 지점에서 새로운 표현이 탄생한다고 생각해요."
'폭군의 셰프'는 연지영이 알 수 없는 사고로 조선 시대로 넘어가는 판타지 사극이다. 절대 미각을 지닌 폭군 이헌(이채민)과 요리로 가까워질수록 권력의 중심부에서 생존과 사랑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지난 28일 종영한 이 드라마는 시청률 17%를 기록하며 '눈물의 여왕' 이후 tvN 최고 성적을 냈다.
흥행의 최대 동력은 음식이다. 단순한 소품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고 권력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연지영은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헌의 취향을 파악하고 인주대왕대비(서이숙)의 과거를 유추하는 등 먹는 사람의 경험과 기호를 우선시한다. 임윤아는 이 대목에서 자기 삶과 캐릭터가 겹치는 지점을 발견했다.
"먹는 사람의 입맛을 모르면 요리를 만들 수 없다는 대사가 있어요. 그런데 연지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맛보는 사람 입장도 중요하지만, 셰프로서 '내가 뭘 보여드릴 수 있을까'를 먼저 고민하게 되는 거예요."
무대와 스크린, 텔레비전에서 오랜 시간 대중의 시선을 받아온 그는 '바라보는 사람을 맞추는 것'에 익숙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바라보는 사람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들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는 시야가 생겼어요. 앞으로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도 맛있게 맛봐 주실까 기대됐죠."
발상의 전환을 구체화한 추진력은 끈기.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능력이다. 데뷔 때부터 평가받아야 했던 숙명 속에서 성실함으로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이번 드라마를 앞두고도 6개월가량 요리를 배우고, 몇 마디 불어 대사를 제대로 발음하려고 개인교습을 받았다. 추운 겨울에는 얇고 허름한 옷을, 여름에는 두꺼운 숙수복을 입고 지방에서 숙박하며 촬영했다. 임윤아는 일련의 과정 자체를 연지영이 느낄 감정의 연장선으로 이해했다.
"연지영은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헤쳐 나가는 끈기가 있어요. 제가 연예계에서 걸어온 길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저만의 색깔이겠죠."
극 안에서 주목한 또 다른 지점도 있다. 음식은 인간의 기억과 감정을 건드리는 본능적 매개체라는 것이다. 판타지 요소가 많고 인물 간 관계가 급변해도 요리로 관객과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실제로 장태유 감독은 이 부분을 힘주어 부각한다. 이헌은 숯불에 구워 내놓은 사슴 혀 요리에 생모와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인주대왕대비는 연지영이 끓인 시금치 재첩 된장국에 입궐 전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연지영의 요리를 먹으면 모두가 어머니를 떠올린다는 설정이 있어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힘이 담겨 있는 거죠. 그게 연지영 요리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시청자들도 그걸 경험했기 때문에 더 입체적으로 봐주신 것 같아요. 누구나 따뜻한 국물 한 숟가락에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곤 하잖아요."
임윤아는 화려한 기술보다 진심을 담고자 했다. 복잡한 감정선보다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를 건드리는 데 집중했다. 특히 음식을 구상하거나 속마음을 드러낼 때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드라마를 처음부터 보지 않은 시청자도 채널을 고정할 수 있게끔 정직하게 캐릭터의 면면을 드러냈다.
"제가 일부러 의식해서 연기한 건 아니에요. 작품을 하다 보면 '이 정도 설명은 있어야 감정이 따라온다'는 포인트가 생기더라고요. 배우로서의 이해와 시청자에게 전할 수 있는 이해,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거죠."
이런 소통 방식은 영화 '엑시트'와 드라마 '킹더랜드'에서도 보여준 바 있다. 밝고 씩씩하게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감정의 결을 또렷하게 전달했다. 하지만 '폭군의 셰프'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권력과 생존이라는 무거운 테마, 판타지적 장치 등과 어우러져 새로운 색채를 발산한다. 단순히 자신이 가장 잘하는 연기를 넘어, 다른 장르와 무대를 통해 배우로서 지평을 넓히는 중이다.
"1년 가까이 연지영을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그만큼 뿌듯해요. 떠나보내기 아쉬운 마음이 클 정도로요. 유독 이 작품은 떠올렸을 때 마음이 찡해지는 감정이 많이 들어요."
그는 작품을 거듭할수록 자신도 모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했다. "늘 똑같이 진심으로 열심히 하는데, 경험이 쌓이면서 저도 인지하지 못하는 발전이 생기는 것 같아요." 임윤아는 앞으로도 매번 다른 색을 찾아가고 싶다고 했다. 손맛이 다르듯, 자기만의 해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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