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여전히 가장 안전한 시장이다."
최근 만난 제임스 김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 회장이 던진 말이다. 아무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계산된 즉흥으로 움직이며 때로는 독단적이고 폭력적인 정책으로 시장을 흔들고 우방을 압박한다 해도, 결국 미국은 교정할 수 있는 나라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잘못된 결정이 내려져도 의회와 법원, 언론과 시장이 작동해 다시 궤도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다. 그 제도적 복원력이 미국을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시장으로 보이게 만드는 힘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그러나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행태는 단순한 보호무역주의를 넘어 동맹국의 안전까지 위협하는 수준으로 번지고 있다. 자동차와 철강, 배터리 부품뿐 아니라 반도체와 의약품까지 고율 관세가 예고되면서 한국 수출기업들은 감당하기 벅찬 상황에 직면했다.
관세보다 더 큰 충격은 조지아 배터리 공장에서 벌어진 한국인 노동자 대규모 단속이었다. 체류 자격 문제로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구금된 사건은 단순한 법 집행을 넘어 미국에선 투자와 고용을 약속한 동맹국과 기업조차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현실을 드러냈다. 국가 간 신뢰가 흔들리자 기업 현장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 사건 이후 한국 기업들의 미국에 대한 셈법은 달라졌다. 현지에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전하러 간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체포돼 구금되면서, 우리의 안전이 위협받는 일이 되풀이된다면 수백조 원을 미국에 묻어둘 이유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기업인들 사이에선 이제 "미국만 믿고 갈 수는 없다"는 말이 공공연히 오르내리고 있다. 관세와 규제에다 예측 불가능한 단속까지 겹치며 결국 한계점에 이르렀다. 이제는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실제로 시장 다변화는 속도를 내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분석에 따르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시행 직후 세계 수출 물동량은 20.8% 감소했지만 같은 시기 미국 외 국가로의 수출은 오히려 늘었다.
그간 한국 기업들이 미국을 첫손에 꼽아온 이유는 분명했다. 세계 최대의 소비지이자 안정된 투자처로서, 위험을 감수할 만한 보상이 따랐기 때문이다. 자본과 인재가 몰리는 생태계는 다른 곳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힘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불확실성은 이 전제를 흔들고 있다. 시장 규모만으로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고 비용은 불어나며 전망은 짙은 안개에 가려졌다. 투자처로서의 우위는 빠르게 희미해지고, 지금의 미국은 오히려 많은 신흥국이나 중진국보다 더 불안한 시장으로 비치고 있다.
물론 미국은 언젠가 다시 균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 회장의 말처럼 미국의 시스템은 스스로 교정하는 힘을 지녔다. 그러나 그 회복의 시점에는 이미 곁을 지키던 나라들이 다른 시장을 향해 발길을 돌린 뒤일 수 있다. 한국을 비롯한 협력국들은 시장을 넓히며 미국 의존을 줄이고 유럽과 아시아 연계를 강화하고 있다. 세계 공급망은 더 이상 한 나라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불안과 위협이 커지면 자본과 기술은 반드시 다른 길을 찾고 그 흐름은 되돌리기 어렵다. 글로벌 최강국 미국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순간은 각국이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의존을 내려놓고도 살아가는 데 익숙해질 때다. 친구가 떠난 자리엔 기술도 일자리도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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