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깅트래블]빛과 역사로 물드는 성곽, 서산 해미읍성축제

전통·미래·체험 어우른 22회 서산해미읍성축제
가족과 함께하는 안전한 체험의 장
예술과 역사, 지역의 전통 잇는 무대

돌담 너머로 스며든 저녁 햇살이 오래된 성곽의 틈새를 타고 흘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잔디밭을 가르고, 부모들은 청허정 앞 빈백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바람을 들이켰다. 낮부터 이어진 공연과 체험은 해가 기울며 다른 얼굴을 띠었고, 그 순간 해미읍성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 있는 무대처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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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위는 세월이 겹겹이 포개졌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그 시간 위를 걷듯 이어졌다. 아이들은 숨이 차도록 뛰다가 꿀잠을 청했고, 부모들은 아이를 맡긴 채 눈을 붙였다. 축제의 슬로건 "아이를 맡아드립니다"는 홍보 문구가 아니라, 안전요원과 미아방지 팔찌, 방역 관리가 더해져 완성된 사회적 약속처럼 느껴졌다. 해미읍성은 축제를 통해 집이자 광장이며 놀이터이자 성지로 관광객을 한껏 품고 있었다.


600년 성곽을 밝힌 미디어 아트

개막식이 열린 26일 오전, 600년 성곽 앞 특설무대에는 서산시장과 충남도지사, 시민과 관광객 2만여 명이 모였다. 몬테네그로 체르나고라 민속앙상블과 서산시립합창단이 흥겨운 식전 공연을 꾸몄고, 홀로그램과 XR 드로잉이 어우러진 개막 퍼포먼스가 해미의 역사와 인물을 성벽 위로 불러냈다.

22회 서산해미읍성축제 26일 진남문 미디어 아트 전경. 서산문화재단 제공

22회 서산해미읍성축제 26일 진남문 미디어 아트 전경. 서산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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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자 성곽은 거대한 스크린으로 변했다. 미디어아트 공연 '600년의 해미, 빛으로 노래하다'가 시작되자 홀로그램과 빛이 겹쳐지고, 합창단의 목소리가 성돌에 새겨졌다. 오래된 성은 잠시 미래의 얼굴을 가졌고, 사람들은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는 듯한 착각에 잠겼다.

이튿날, 해미읍성 안에서는 조선 태종대왕 행렬이 이어졌다. 북소리가 울리고, 붉은 장막 속에서 전통혼례가 거행됐다. 실제 커플이 혼례를 올리는 순간, 퍼포먼스는 단순한 재현을 넘어 하나의 서사가 된다.

22회 서산해미읍성축제 개막식 몬테네그로 체르나고라 민속 앙상블 공연. 서산문화재단 제공

22회 서산해미읍성축제 개막식 몬테네그로 체르나고라 민속 앙상블 공연. 서산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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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곁에는 거대한 거북차(龜車)가 전시돼 있다. 서산 출신 무장 안열이 고안했다는 16세기 육상 돌격차. 내부에는 병사 서른 명이 들어가고, 외부에는 창과 칼, 거북머리에는 포가 달렸다. 군사학자 이원승 박사는 "하나는 육지, 다른 하나는 바다였을 뿐"이라며 거북차와 이순신의 거북선을 나란히 설명한다. 전시 옆 벽면에는 초등학생들이 그려낸 거북차 그림이 걸려 있다. 서툰 색연필 선이 오히려 기록보다 선명하게 상상력을 자극하고, 역사는 그렇게 오늘의 시선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이날 저녁, 현대자동차그룹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올라 음악과 기록 영상이 맞물린다. 정주영 회장의 '통일 소떼 방북', 서산 산업현장의 장면이 연주와 함께 흐르며 지역의 기억은 국가의 서사로 확장되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축제 떡메치기 체험에 참가한 아이들이 직접 장인과 함께 떡을 메치는 모습. 서산문화재단 제공

서산 해미읍성축제 떡메치기 체험에 참가한 아이들이 직접 장인과 함께 떡을 메치는 모습. 서산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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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동안 아이들은 떡메치기와 전통의상 포토존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어르신들은 교황 사진전 앞에 서서 지난 기억을 더듬는다. 한쪽에서는 세대의 기억이, 다른 쪽에서는 아이들의 놀이가 흘러 같은 공간 안에 포개지고 있다.


축제 마지막 날인 28일엔 EDM 파티와 어린이 뮤지컬 '해미야 놀자!', 인기 캐릭터와 함께하는 '로보카폴리 싱어롱쇼'가 이어질 예정이다. 전통과 현대를 잇는 무대, 남녀노소가 어울릴 수 있는 38개의 프로그램이 축제장을 채우며, 아이들의 함성과 부모의 박수, 어르신의 미소가 어우러진 피날레를 예고한다.

22회 서산해미읍성축제 개막식 행사 합창단 공연 모습. 서산문화재단 제공

22회 서산해미읍성축제 개막식 행사 합창단 공연 모습. 서산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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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고통이 공존…원형이 살아 있는 성

해미읍성은 축제 무대이자 동시에 신앙의 성지다. 지난 4월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방한 당시 이곳을 찾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이어진 박해 시기, 1000여 명의 신자가 이곳에서 고문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진남문 옆 300년 된 회화나무에는 여전히 철사줄 흔적이 남아 있고, 성 밖 자리개돌에는 태질로 순교한 이들의 넋이 묻혀 있다. 교황청은 2020년 이곳을 국제성지로 지정했고, 2021년 최종 선포했다. 오늘 축제의 웃음과 과거의 고통이 겹쳐지며, 해미읍성은 현재의 기쁨과 기억의 무게를 동시에 품는다.

해미읍성은 순천 낙안읍성, 고창 읍성과 함께 3대 읍성으로 꼽힌다. 1417년 태종 때부터 축조돼 성종 때 완성된 뒤 230여 년 동안 충청도의 군사 중심지였고, 이순신 장군 역시 1579년 이곳에서 10개월간 군관으로 근무했다. 높이 5m, 둘레 1.8km의 성곽 안에는 동헌, 객사, 내아, 옥사, 민속가옥이 복원돼 있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른 시간이 펼쳐진다. 내아 건물은 고풍스러운 한옥미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배경으로 쓰이기도 했다.

석양으로 붉게 물든 충남 서산 간월암 전경. 서산시 제공

석양으로 붉게 물든 충남 서산 간월암 전경. 서산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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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의 또 다른 풍경, 간월암은 바닷물이 차면 섬이 되고 빠지면 길이 열리는 작은 암자다. 만조의 풍경은 연꽃처럼 떠올라 '연화대'라 불린다. 저녁노을 무렵, 바다와 암자, 서해 낙조가 겹쳐 만들어내는 장면은 환상에 가깝다. 무학대사가 수도하며 남긴 전설과 어리굴젓의 유래가 얽힌 이곳은 지금도 굴부르기 군왕제를 이어가며 풍년을 기원한다.


개막의 환호와 진행되는 행렬, 이어질 마지막 무대까지. 해미읍성은 지금, 과거와 현재, 생활과 축제, 전쟁과 신앙의 기억이 동시에 호흡하는 살아 있는 성으로 우뚝 서 있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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