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기업들이 대학 교육과 입시제도가 산업 현장의 인력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창의성과 실무 역량을 갖춘 인재가 충분히 길러지지 못해 졸업생을 현장에 투입하기까지 장기간 재교육이 불가피한 구조가 자리 잡았으며, 이로 인해 청년 고용시장의 미스매칭이 심화되고 기업 경쟁력에도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대학이 창의적 인재를 양성해 기업에 공급해줘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다.
25일 아시아경제가 지난 15일부터 19일까지 주요 30대 기업 인사·채용 담당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이 원하는 인재와 대졸 인력 간 미스매칭 진단'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학 교육이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이상적 인재 양성에 기여한다'고 답한 곳은 2곳(6.7%)에 그쳤다. 나머지 28곳(93.3%) 가운데 19곳(63.3%)은 '보통 수준'이라고 응답했고, 9곳(30.0%)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대학 교육이 산업 인력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미스매칭 현상이 굳어지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입시제도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학 입시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에 기여한다'고 답한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었다. 19곳(63.3%)은 '보통 수준에 머문다'고 했고, 9곳(30.0%)은 '기여하지 않는다'고 평가했으며, 2곳(6.7%)은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점수 위주의 획일적 선발 방식이 학생들의 적성과 역량을 세밀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창의성과 실무 능력을 갖춘 인재를 선발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입시 공정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산업계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역량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 교육 체계의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전공 역량 평가에서도 대학과 현장 사이의 간극은 뚜렷했다. 기업 수요가 이공계·공학·정보기술 분야에 20곳(66.7%)으로 집중돼 있었지만, 졸업생의 전공 역량이 현장에서 곧바로 통용된다고 본 기업은 6곳(20.0%)에 그쳤다. 반면 23곳(76.7%)은 '보통이다'고 답해 대학에서 배운 지식이 산업 현장의 요구와 직접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신입사원을 독자적으로 현장에 투입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길었다. 응답 기업 절반인 15곳(50.0%)은 '1년가량의 재교육·훈련이 필요하다'고 했고, 10곳(33.3%)은 '2년 이상이 걸린다'고 답했다. 최소 1년 이상을 재교육해야 한다는 응답이 전체의 83.3%에 달해 대학 졸업장이 직무 수행 능력을 곧바로 보장하지 못하는 현실을 드러냈다. 이는 청년층 입장에서는 취업 이후에도 장기간 적응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으로, 경력 단절과 노동 효율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재교육이 집중되는 영역은 '문제 해결 및 프로젝트 수행 능력(14곳·46.7%)'과 '기초 실무 기술(10곳·33.3%)'이 주를 이뤘다. 이는 학생들이 대학에서 전공지식은 배우더라도, 실제 업무 과정에서 부딪히는 복합 과제 해결이나 장비·프로그램 운용 같은 기본 역량은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일부 기업은 직접 응답을 통해 "대학 교육이 여전히 시험과 이론에 치중해 학생들이 '실제 문제 해결 경험'을 쌓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기업들은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학 교육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튼튼한 전공 지식을 갖추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장에서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 실무 중심 교육이 강화돼야 한다"며 "기업 연계 현장실습을 통해 문제 해결과 협업 능력을 체계적으로 길러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대학 교육이 과거의 이론에 머물러 있어 창의적 해결 역량을 배양하지 못하고 있다"며 "학생들이 업계 동향과 기업의 실제 요구를 이해하고, 조직생활에 필요한 인성과 리더십까지 준비할 수 있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 대학이 학문적 성취에 치중한 나머지 사회적·산업적 수요를 반영한 인재 양성에는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점이 이번 조사에서 드러났다. 산업계와의 괴리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청년층은 취업 이후에도 장기간 재교육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고, 기업의 부담도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구조가 장기화될 경우 국가 경쟁력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글로벌 무대에서 기업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대학이 창의성과 실무를 결합한 교육으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대학 무용론' 논란은 더욱 확산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산업 변화 속도가 과거보다 훨씬 빨라진 만큼 교육 지체가 더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신산업 분야에서 요구하는 역량은 2~3년 사이에도 급변하는데 대학 커리큘럼은 수십 년 된 체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육과정 개편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교수진의 연구 주제와 산업 현장이 요구하는 기술이 달라 괴리가 발생하는 구조적 한계도 뚜렷하다. 특히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등 핵심 산업의 경우 빠른 기술 추격이 기업 생존에 직결되지만, 대학은 여전히 전통적 전공 틀에 묶여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국내 대기업의 한 최고경영자(CEO)는 "교육과 산업 수요 사이의 괴리가 단순히 교수법 문제가 아니라 협력 구조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학위만으로는 산업 현장에 적응할 수 없는 만큼 대학이 기업과 함께 실질적 역량을 길러줄 수 있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외 주요 대학들은 산학협력 강화를 통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어가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일부 대학은 학부 과정에서부터 기업 프로젝트를 정규 학점으로 인정하고, 졸업 전 최소 6개월 이상의 현장 경험을 필수화한다. 학생이 졸업과 동시에 곧바로 직무에 투입될 수 있도록 설계된 교육 체계로, 한국 대학의 경직된 구조와 차이가 크다. 반면 한국에서는 인턴십이 선택적·단기 경험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기업이 요구하는 실질적 역량 축적과는 거리가 있다.
박남기 광주교대 명예교수는 "대학은 모든 기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초 역량을 길러주면서도, 학생들이 여러 전공을 묶어 공부할 수 있는 '트랙제'와 소규모로 특정 분야를 집중해 배우는 '마이크로 학위 과정' 같은 제도를 함께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