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학의 인재 유출은 교수뿐 아니라 석·박사급 인재, 대학생, 초·중·고 학령기 학생 등 연령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특히 어린 나이에 유학길에 오르는 인재들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대학 졸업 후 갖게 될 기회나 기대소득이 천양지차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입시도 주요 원인이다. 교육계는 단위별로 인재를 국내에 붙잡을 수 있는 유인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대학은 더이상 한국을 이끌어갈 원동력으로 기능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미국으로 아들 두 명을 유학 보낸 이 모(53) 씨는 "큰 아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해 유수한 공대에 입학했고, 작은 아들도 큰 아들과 마찬가지로 대학 진학을 준비 중"이라며 "국내에서 과외·학원을 보내며 사교육비를 쓰는 것과 비용 측면에서 큰 차이가 없는데 향후 취업해서 받을 수 있는 기대소득은 미국이 훨씬 많다"고 말했다. 이 씨는 "무엇보다 한국 대학보다 미국의 연구 환경이 월등히 좋은 것은 물론 연구문화도 자유롭다"면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음악을 전공한 전 모(20) 씨는 국내 대학과 해외 대학 중 고민하다가 결국 유학길에 오르기로 했다. 초·중·고 시절 꾸준히 영재원에 합격할 만큼 '실력파'로 인정받았지만, 어느 학교 출신인지, 어느 교수에서 사사했는지 등을 따지는 학연·지연·인맥 중심 문화가 세계 무대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음악 전공자조차 '국영수과사' 모든 교과목을 1점차로 줄세우는 교육에서는 실기 실력을 쌓기도 어려워 보였다. 전 씨는 "영국 왕립대학에 장학생으로 선발됐다"며 "해외에서 기회를 찾고 싶다"고 했다.
코로나19 이후 최근 4년간 국내를 떠난 초·중·고 학생은 총 5만4496명에 이른다. 학급별로 보면 초등학생 3만7855명, 중학생 1만2596명, 고등학생 4045명 등이다.
국내 학령인구는 줄고 있지만, 해외 유학길에 오르는 학생 비율은 줄지 않았다. 최근 4년 새 학령인구는 532만명에서 513만명으로 20만명가량 줄었지만, 매년 1만명씩 해외로 나가면서 해외 출국 비율은 꾸준히 0.2%대가 유지됐다.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초·중·고 해외 출국 학생 수는 2019년 1만9000명에서 코로나19 이후 2021년 8000명대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듬해 곧바로 1만명대를 회복해 1만1000명을 넘어섰다. 이후 2023년에는 1만5000명, 지난해 1만4000명이 해외로 떠났다. 올해도 이런 추세는 유지돼 이미 1만3000명이 유학길에 올랐다.
이들이 한국을 떠나는 이유로는 과도한 입시 경쟁, 개인의 특·적성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교육환경, 비싼 사교육비 등이 꼽힌다. 초·중·고를 지나 대학생이 돼도 이 같은 고민은 지속된다. 교육부의 '2024 국외 고등교육기관 한국인 유학생 현황' 자료를 보면 2018년 22만명이었던 해외 대학 유학생 수는 2021년 15만명, 2022년 12만4000명대로 급감했다가 지난해부터 12만7000명 수준으로 반등 기미를 보이고 있다. 국가별로는 북미권에 5만5000명가량이 집중됐다.
국내 대학은 빈사 상태로 치닫고 있다. 올해 대학 신입생을 뽑은 마지막 단계인 2025학년도 추가모집에서 49개 대학이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이 가운데 82%(40곳)가 지방 소재 대학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지방대 붕괴'가 당면 과제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인재 양성 기관인 '대학의 위기' 신호라는 분석이 나온다. 인구감소 추세와 의대 등 특정 학과로의 쏠림, 수능 중심의 대입제도 등을 고려할 때 더 많은 대학이 붕괴될 수 있다는 의미다.
국내 유수 대학들은 석·박사급 인재 유출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성장이니셔티브(SGI)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 1만명 당 인공지능(AI) 인재 유출은 0.36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5위에 그쳐 최하위 수준이다. 두뇌 수지 적자도 확대됐다. 해외로 유출된 전문인력이 2019년 12만5000명에서 2021년 12만9000명으로 늘어난 반면 같은 기간 국내로 들어온 외국 전문인력은 4만7000명에서 4만5000명으로 줄어든 까닭이다.
전문가들은 전방위적인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각 단위별로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우선 대학교수와 석·박사급 고급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해 성과 연동형 보상제도를 도입하고 연구개발 지원 확대, 경직된 연구문화 개선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진단했다. 이와 함께 학령기 인재 이탈을 막기 위한 방안도 시급하다. 줄세우기식 교육에서 벗어난 인공지능 시대 창의적 인재 양성 방안이 요구된다.
오철호 숭실대 명예교수는 "AI 3대 강국을 목표로 하지만 이를 실현할 고급 인재가 없다"면서 "문제는 이들을 국내로 돌아오게 할 유인책이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 명예교수는 "틀에 갇힌 주제, 한정된 연구기금과 대학 재정 등으로 교수들은 해외 대학으로 발을 돌리고, 학위를 따도 일자리가 없는 석·박사는 외국 기업에서 기회를 찾는다"면서 "특히 석·박사 해외 유출의 핵심은 이공계이지만, 인문 사회계열도 이공계보다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뿐이지 여건만 되면 해외로 갈 잠재군이 빼곡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국가가 명운을 걸고 단기·중기·장기 계획을 세워서 인재 유출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기정 한양대 총장(한국대학교육협의회 부회장)은 "세계경제포럼(WEF)은 5년 내 92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1억7000만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며 현재 직무에 요구되는 기술 중 39%는 효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한다"면서 "이는 학위가 더이상 취업과 평생 직장을 보장해주지 않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알리는 지표"라고 진단했다. 이 총장은 "지금과 같은 경직된 체제로는 다가올 미래를 유연하게 대비할 수 없다"면서 "대학을 비롯해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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