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유교의 나라였다. 유교의 정신은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다스렸으며 충신, 효자, 그리고 열녀가 존경받는 인간상이었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는 자식은 좋은 세상이 되기 위한 디딤돌이 되겠지만 열녀는 조금 달랐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열녀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호랑이와 싸우거나, 재혼할 수 있는데도 수절하는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시기를 거치면서 열녀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살하거나, 아니면 죽은 남편을 따라 죽는 사람들로 바뀌었다. 그래서 수많은 여성은 사회적인 압박 속에서 자살했고 때로 타살이 열녀로 꾸며지기도 했다.
화순옹주는 영조의 딸이며, 사도세자의 누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영조가 처음 사랑했던 후궁 정빈 이씨였다. 영조는 수많은 환란을 겪고 형 경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는데, 그 와중 어머니 정빈과 오빠 효장세자는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했고 오직 화순옹주만 살아남았다.
이후 영조는 다른 여인을 총애하게 되고 많은 동생들이 태어났다. 그러다 나이가 차게 된 화순옹주는 월성위 김한신과 혼인했다. 비록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은 없었지만 금슬은 좋았다 한다. 그러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는 남편을 따라 죽기로 결심하고 음식을 거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직접 딸의 집으로 찾아가 음식을 먹을 것을 명령했다. 왕명을 거부할 수 없었던 화순옹주는 억지로 음식을 먹지만, 금방 토해내고 말았다. 그걸 본 영조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화순옹주는 결국 1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화순옹주를 열녀로 삼으려고 했지만 영조는 화를 내며 반대했다. 아무리 열녀라 해도 자식이 부모의 뜻을 어기고 먼저 죽은 불효를 저질렀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친정아버지는 남편을 잃은 딸들에게 "제발 죽지 마라"라고 부탁하는 일이 많았으니 아무리 열녀가 중요해도 부모는 자식이 더 중요했다. 결국 화순옹주가 '열녀"가 된 것은 조카 정조 때의 일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화순옹주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왕의 딸이라는 고귀한 신분, 부와 권력이 보장되어 있었다. 물론 남편의 죽음은 슬픈 일이었지만 양자를 들이고 여전히 왕궁에 드나들며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화순옹주에게 죽음은 가장 능동적인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동생 화완옹주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화완옹주는 언니와 비슷한 시기에 남편을 잃었지만 야심가 정후겸을 양자로 들였고, 조카 정조와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패배하여 양자는 처형당하고, 화완옹주는 작위와 모든 것을 잃고 귀양을 갔고, 죽은 이후로도 정씨의 아내라는 '정처'로 불릴 뿐 왕의 딸로서의 신분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죽음을 선택했던 화순옹주는 이런 수라장에 엮이지 않았고, 죽은 이후로 열녀의 상징인 홍살문이 세워지며 명성이 남았다. 죽은 다음의 영광이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동생 화완옹주를 보면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은 중요했다.
비록 왕의 딸로 태어났지만 관직을 가질 수도 없고, 혼처를 선택할 권리도 없으며, 재혼을 할 수도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열녀라는 불멸의 이름을 얻는 것이 그녀로서는 가장 강력한 자기결정이었을 수 있다. 화순옹주의 죽음은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일 수도 있지만, 딸로서 아버지의 명령을, 신하로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죽음을 선택한 화순옹주는 진정으로 강한 여인이었다.
이한 역사작가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