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이 미국 당국의 비자 단속 여파로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합작 공장 건설 일정이 차질을 빚게 됐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미국 이민 당국이 사업장에서 대대적인 비자 단속 이후 우리 기업들의 투자 위축과 공장 건설 일정 지연 가능성이 제기됐는데, 이를 처음 인정한 것이다. 협력사를 포함해 300여명의 직원이 구금됐던 LG에너지솔루션 역시 이들에게 한 달간 특별 공가를 부여하기로 하면서 최소 한 달 이상 공사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무뇨스 사장은 11일(현지시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자동차 행사에 참석해 "이번 일(미 당국의 비자 단속)로 최소 2~3개월의 공사 지연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인력이 한국으로의 복귀를 원한다"면서 "그러면 그 자리를 어떻게 채울지도 모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공장 건설 단계에는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며 "미국에서 구할 수 없는 기술과 장비가 많다"고 차질 배경을 설명했다.
현대차 와 LG에너지솔루션 은 2026년 상반기 완공을 목표로 미국 조지아주에 배터리 합작 공장을 건설해왔다. 하지만 설비 공정 전문가 등 인력 수급에 차질이 생기면서 완공 시기는 하반기 이후로 늦춰질 전망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자사 직원들과 협력업체 직원들에게 내달 12일까지 4주의 공가를 부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가는 회사나 국가가 정한 공적인 사유로 근로자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공장 재개 시점은 더욱 늦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회사 관계자는 "거의 완공 직전이었는데 갑작스러운 변수로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며 "현재로선 공장 피해 규모나 재개 여부 등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우리 직원을 한국으로 안전하게 귀국시키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공장 설립 지연은 현지에 진출한 다른 기업들의 투자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미 투자를 확정한 반도체·자동차·배터리 기업들은 공장 착공이나 인력 투입 시기를 늦출 수밖에 없고 신규 투자를 검토하던 기업들은 안정성과 방향성을 재평가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흐름은 삼성전자 의 미국 텍사스 테일러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에도 직접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공장은 첨단 2㎚(1㎚=10억분의 1m) 반도체 생산 라인을 구축해야 하는 핵심 투자처로, 한국에서 숙련 인력이 대거 파견돼야 하지만 비자 발급 지연으로 차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특히 삼성뿐만 아니라 부품·장비 협력사들까지 현지 법인을 두지 않았다면 L1비자를 받기 어렵다는 점에서 부담이 크다.
업계 관계자는 "L1비자를 받은 인원부터 파견을 준비하더라도 새 발급에는 수개월이 걸린다"며 "협력사 인력까지 제약을 받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테슬라와의 협력을 위해 테일러 공장을 조속히 완공해야 하지만 설비 발주 준비 단계부터 불확실성이 커진 상태"라며 "정부 간 협상이 이뤄지길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그는 또 "현지 인력 채용 비중을 어느 수준까지 높일지도 고민이지만, 최소 20% 이상은 한국 숙련 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단기적으로는 부정적 영향이 불가피하다"며 "착공하지 않은 기업들은 일정을 늦출 수밖에 없고 착공이 진행 중인 경우도 준공 시점을 조정하거나 비용을 다시 계산해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공장 건설과 설비 반입 단계에서는 한국 기술자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미국 인력만으로 대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기업들은 미국 시장이 여전히 한국 기업과 우리 경제에 핵심적인 전략 시장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이날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미국 오토모티브뉴스 행사에 참석해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감을 느꼈다"고 소회를 밝힌 후 "미국은 현대차의 가장 크고 중요한 시장"이라며 "(자동차 제조업체로서) 미국 시장에 더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 당국의 대대적인 단속 이후에도 미국 투자에 대한 기조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어 "비자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양국이 함께 더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무뇨스 사장도 "이번 사건이 매우 유감스럽지만 미국 시장의 전략적 중요성은 현대차에 변함이 없다"며 "지난 몇 년간 투자를 해왔으며 앞으로도 투자를 지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배터리 합작 공장 설립 지연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 내 생산 전략 수정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아메리카(HMGMA)에서 전기차 생산 비중을 낮추고 하이브리드를 늘리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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