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선처하고 피해자 방치하고…'잠정 조치' 어겨도 솜방망이 처벌

올해 판결문 전수 분석
선처에 그친 판결 사례들
사법 당국 인식 바뀌어야

스토킹 피해자에 대한 접근·연락을 금지하는 잠정 조치를 어겨 재판에 넘겨진 가해자 10명 중 1명만 실형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실질적 보호 장치 마련과 잠정 조치 위반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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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아시아경제가 대법원판결 열람 시스템을 통해 올해 선고된 잠정 조치 위반 스토킹 범죄 판결문 316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 가해자 278명(88.0%)이 실형을 받지 않았다. 이 가운데 집행유예가 154명(48.8%)으로 가장 많았고 벌금형은 124명(39.2%)이었다. 사실상 상당수 스토킹 가해자가 법원으로부터 선처받은 셈이다.

잠정 조치는 스토킹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경찰이 검찰에 신청하고, 법원이 이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내려진다. 피해자의 주거지·직장 등 100m 이내 접근 금지, 전화·문자·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유·무선 통신 수단을 통한 연락 금지 등이 주요 내용이다. 이를 위반할 경우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잠정 조치를 위반하고 피해자에게 재차 접근하는 행위는 단순 위법이 아니라 강력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 신호로 지목된다. 지난 7월 울산에서 교제했던 여성을 흉기로 수십 차례 찔러 살해하려 한 장형준(33)은 피해자에게 감금과 폭행을 저질러 법원으로부터 잠정 조치를 받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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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법원은 잠정 조치를 어긴 가해자에게 실형을 내리는 데 소극적이다. A씨는 지난해 10월 잠정 조치에도 불구하고 부산 동래구 피해자의 직장 근처를 찾아가거나 여러 차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부산지법은 지난 7월 A씨에게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B씨는 올해 1~4월 주거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았음에도 피해자의 주거지를 찾아가 현관문을 여러 차례 두드렸으나 대전지법 서산지원은 지난 7일 B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가해자들이 실형을 받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스토킹 전력이 없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스토킹 범죄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사법 당국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은의 변호사는 "판사들이 자신이 당할 가능성이 낮은 범죄에 대해서는 피해의 심각성을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다 보니 잠정 조치를 어겨도 벌금이나 집행유예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며 "재산범죄나 사기에는 실형을 선고하면서도 (스토킹 같은) 사실상의 폭력 범죄에는 관대한 이중적 태도를 벗어나야 스토킹 범죄의 예방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스토킹을 막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은 가해자를 구치소 등에 수감하거나 전자발찌를 부착하도록 하는 것"이라며 "그러나 법원과 수사기관이 스토킹의 위험성을 가볍게 여기는 인식이 강하다 보니 이런 조치에는 여전히 소극적인 편"이라고 말했다.





변선진 기자 s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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