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인데 할 수 있겠냐"…면접 떠올린 '그알' 박지선 교수 "내가 가면 길이 열린다"[파워K우먼]

박지선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 인터뷰
범죄심리학 불모지서 자신만의 길 개척
피해자다움 연구로 사회 인식 변화 기여
수사·재판 자문 통해 판결 영향 끼쳐

2003~2004년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내에서 범죄심리 분석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극도로 잔혹한 수법을 사용한 그는 범행에 앞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기존에 경험하지 못한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면서 사회 각계각층에서 범죄자 행동·심리 분석을 통해 흉악 범죄 재발을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2000년대 초만 해도 국내 범죄심리 연구는 학문적으로나 실무적으로나 초기 단계였다. 범죄심리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대학이 없었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박지선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범죄심리학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 무작정 떠났다. 영국 리버풀, 미국 뉴욕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여성 범죄심리학자는 극히 드물었다. 수많은 사회적 편견과 어려움을 딛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갔다. 현재 박 교수는 연구·자문뿐만 아니라 방송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범죄 피해자 인식 개선과 범죄 예방 등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내고 있다. 국내 대표 범죄심리학자 반열에 선 그를 아시아경제가 만났다.

박지선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가 12일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진형 기자

박지선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가 12일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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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심리학 전공을 택한 계기는 무엇인가.

▲어렸을 때부터 범죄 심리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원에 진학할 때 국내에는 범죄심리를 가르치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우선 사회심리학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다녀 보니 '순수 심리'가 아니라 배운 것을 직접 현장에서 쓸 수 있는 '응용 심리'가 너무 하고 싶었다. 범죄심리를 배울 수 있는 대학원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영국 리버풀에 수사심리학 과정이 있다고 뜨더라. 국내 석사 1년 차에 휴학하고 리버풀로 갔다.


-당시 리버풀 대학원 진학은 흔치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다. 리버풀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잘 맞으면 리버풀에서 박사까지 할 생각도 있었지만 막상 가보니 생활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비가 언제 올지 예측할 수 없는 날씨에 문화도 적응이 안 됐다. 같은 영국이라도 리버풀에서 사는 것과 런던에 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박사 과정까지는 어렵겠다는 생각에 학위 취득 후 일단 한국으로 돌아왔다. 휴학했던 사회심리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공부는 미국에서 했다.


-범죄심리 분야는 오랜 시간 남성 중심의 연구와 실무가 주류였다. 학계와 범죄수사 현장에서 여성으로서 겪었던 어려움은 없었나.

▲박사 학위 취득 후 한국에 돌아와 경찰대 교수 면접을 봤다. 범죄심리학 전공에 대해 이야기하니 "여자인데 할 수 있겠냐"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이런 차별적 질문이 면접장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놀라웠다.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쳤지만 면접관 중에는 이런 질문을 창피해하는 교수님도 있었다. 이에 마음을 다잡고 "저를 전혀 몰라서 하는 말씀"이라고 받아넘겨 다행히 잘 지나갔다. 이제는 범죄심리학자라고 하면 여성도 흔하게 떠올리는 시대가 됐으니 후배들은 내가 겪은 일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범죄심리학자로서 연구한 지 17년가량 지났다. 그간 한국의 범죄양상은 어떻게 달라졌나.

▲과거에는 오프라인 성범죄에 대한 우려가 컸다면 지금은 디지털 성범죄나 딥페이크, 지인 능욕 등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이 체감할 정도로 매우 커졌다. 이제 오프라인 스토킹만 발생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다양한 온라인 스토킹이 함께 나타난다. 전화, 문자, 메신저, 이메일은 물론 인터넷 송금 시 위협 메시지를 넣어 보내는 사례까지 등장하고 있다. 익명성이 높고 전파 속도도 급격히 빨라졌다. 그만큼 스토킹, 교제 폭력 등 관계성 범죄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개인 문제로 치부됐던 가정 폭력, 연인 간 폭력도 국가가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처리하는 분위기다.


-범죄심리학자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범죄심리학 수업에서 범죄 사건을 다룰 때 일부 학생들은 사건의 잔혹함 때문에 '무섭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범죄자를 단순한 관찰 대상이 아닌 분석하는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대학 교육을 받고, 전과 없이, 사회생활을 해온 내 관점과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범죄자의 배경과 성격, 사고방식을 깊이 이해하며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분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사건과 범죄자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

박지선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가 12일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강진형 기자

박지선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가 12일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강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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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심리학자로서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은 언제였나.

▲수사,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다. 피해자에게 울거나 감정적으로 힘든 모습을 보이기를 기대하고, 그렇지 않은 피해자는 진짜 피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이 수사 과정이나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재판 과정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법원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었는데 판사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은 호응을 해줬다. 실제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를 보는 시선을 변화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또한 경찰, 검찰 등에서 자문을 하면서 제출한 심리 분석 의견서가 판결에 영향을 미칠 때 큰 보람을 느낀다.


-최근에는 어떤 연구 활동을 하고 있나.

▲자기애, 나르시시즘에 대한 관심이 많다. 보통 범죄자가 잡히면 사이코패스 여부에 관심을 많이 갖는데 사실 일반 사람들이 사이코패스를 만나 상호작용할 확률은 매우 낮다. 반면 과도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들은 주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따라서 나르시시즘 성향이 높은 사람들의 해악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실제 교제 폭력 관련 판결문을 보면 전과가 없는 20~30대들이 첫 범죄로 교제 폭력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원인을 분석해보면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을 때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 등 활발한 방송 활동을 하고 있다.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좋은 결과로 이어질 때가 있다. 대표적 사례가 부산 돌려차기 사건이다. 원래 성범죄라는 점이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다가 언론 보도 이후 큰 관심을 받으면서 재판 과정에서 방향성이 바뀐 것이다. 이런 사례를 보면서 언론과 대중의 시선이 실제 정책이나 재판 절차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늘 의식한다. 그래서 용어 선택을 신중히 하고 미디어에서 범죄를 어떻게 그리는지도 계속 모니터링한다. '몹쓸 짓'이라는 표현으로 범죄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는 것, 범죄자를 영웅화한다거나 지능이 좋은 사람으로 묘사를 하는 것 모두 적절하지 않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단기적으로는 스토킹 처벌법 시행 이후 몇 년간 쌓인 판결문을 분석해 국내 스토킹 범죄의 발생과 처리 현황을 연구하는 것이 목표다. 장기적으로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거나 영화 제작에 도전해보고 싶다. 몇 년 전에 시나리오 쓰기를 배우기도 했는데 교수와 병행하기가 쉽지 않아 더 지속하지는 못했다. 전문성을 살려 범죄 영화 제작에 기여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


-여성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범죄심리학 전공을 선택할 때 국내 취업 경로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직업을 가질 수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았다. 내가 가면 길이 열리는 것이다. 남들이 잘하지 않는 분야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강점이 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길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박지선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가 12일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강진형 기자

박지선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가 12일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강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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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선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서울대 사범대학 영어교육과·사화과학대학 심리학과를 복수전공했다. 2003년 영국 리버풀대 수사심리학 석사, 2004년 서울대 대학원 사회심리학 석사, 2009년 미국 뉴욕시립대 존 제이 칼리지 오브 크리미널 저스티스(John Jay College of Criminal Justice) 범죄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이후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살인, 성범죄, 교제폭력 등이며 범죄자 프로파일링, 범죄 피해자 인식 연구에도 활발히 기여해왔다. 대법원 양형위원회 전문위원, 경찰청 과학수사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법적 판단과 수사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박 교수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등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범죄심리학 대중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권현지 기자 hjk@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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