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모호성에 있다?...'구멍 숭숭' 노란봉투법에 혼란 가중

법 적용 경계 불명확…중소기업 현장 혼란 확산
'교섭 주체' 놓고 원청·하청 충돌 불가피 우려 나와
선례 되지 않으려 선제적 방어 논리 구축 움직임도

"몇 주간의 파업에도 존폐가 위태로워지는 저희 같은 곳은 어쩌란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회사가 망해서 일자리가 사라지면 누가 책임질 건데요?"


산업용 기자재를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 제조기업 대표 장모씨는 끝내 국회를 통과한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 얘기에 불만과 우려가 섞인 어조로 기자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장씨는 "우리 같은 기계 업종은 몇 달에 한 번, 수십억 원짜리 장비를 제작해 납품하는 구조"라며 "한 번 납품이 막히면 회사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노조가 원청에 직접 찾아가 떼를 써도 손 쓸 도리가 없도록 하는 게 노란봉투법이라는데, 이렇게 되면 가장 힘든 건 저희 같은 중소기업과 근로자들 아니겠느냐"라고 따져 물었다.


또 다른 협력 중소기업의 대표 김모씨는 "원청 기업이 1년 내내 교섭하느라 경영에 차질이 빚어진다는 우려는 지나친 것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도대체 어떤 얘기가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면서 "관련 협회 같은 곳에 물어도 뾰족한 답을 들을 수가 없다. 다들 자기 입장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쓰거나 너무 안일한 얘기를 제각각으로 하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악마는 모호성에 있다?...'구멍 숭숭' 노란봉투법에 혼란 가중

27일 중소기업계에 따르면 노란봉투법 시행을 앞두고 대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들의 불안감과 혼란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사용자 범위와 노동쟁의 대상이 확대된 가운데 법 적용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확대 해석의 여지가 곳곳에 남아있는 모호성이 특히 이 같은 불안과 혼란을 부채질한다. 이런 불명확성 탓에 산업 현장의 예측 가능성이 유례없는 수준으로 낮아지고, 결과적으로 기업과 노조 간, 심지어 노조와 노조 간 자의적 해석에 따른 갈등이 일파만파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중소기업계를 포함한 산업계와 경영계 일각에선 하나의 사업장에 복수 노조가 있을 경우 교섭대표 노동조합을 정하고 단일 창구를 만들어 교섭도록 한 '교섭창구 단일화' 규정이 그나마 의지할 구석이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정부는 이 같은 목소리를 고려해 원청이 수십 개 하청 노조와 일일이 교섭하는 혼란을 피할 수 있도록 교섭창구 단일화 규정이 형해화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분위기다. 이 같은 원칙이 최종적으로 유지되고 효력을 발휘한다면 산업계에서 우려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될 가능성은 작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정봉수 강남노무법인 대표노무사는 이와 관련해 "1년 내내 교섭에 시달린다는 이른바 '교섭 소모전'은 법을 잘 몰라서 나오는 얘기"라면서 "노조법상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에 따라 원청은 하청 노조에 단일 교섭창구를 꾸리고 오라고 요구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정 노무사는 또 "원청은 단일화된 교섭창구만 상대하면 되고, 이를 거부하지 않는 한 부당노동행위로 볼 수 없다"면서 "부당노동행위는 교섭창구가 단일화된 뒤 교섭 자체를 거부했을 때만 성립한다"고 강조했다.

악마는 모호성에 있다?...'구멍 숭숭' 노란봉투법에 혼란 가중

문제는 이 같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단일화된 교섭창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원청과 하청 노조 간의 불협화음, 이른바 '노노갈등'이 불거질 우려가 있고, 이 자체로도 산업 전반의 급격한 생산성 저하가 야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경우에 따라 임금이나 수당 등 처우 개선의 '파이'를 하청 노조와 나눠 가져야 할 수도 있는데, 이를 원청 노조나 기득권을 쥔 노조 내 세력이 용인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윤상필 노무법인 도원 대표노무사는 "정부 시행령이나 가이드라인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원청과 하청 근로자 간 교섭 요건을 둘러싼 분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윤 노무사는 "원청은 교섭 대상 범위를 최대한 좁히려 할 것이고, 반대로 하청업체들은 원청과의 교섭권을 확보하기 위해 법 해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할 것"이라며 "교섭 대상 범위를 얼마나 신속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규정하느냐가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시행령 개정 등으로 교섭창구 단일화와 관련한 입법의 공백을 보완하고, 노사 합의가 무산될 경우 중앙노동위원회의 조정에 따르게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노란봉투법 국회 통과 하루 뒤인 지난 25일 현대제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여의도 국회 앞에서 원청 현대제철의 직접고용을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노란봉투법 국회 통과 하루 뒤인 지난 25일 현대제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여의도 국회 앞에서 원청 현대제철의 직접고용을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중소기업계 관계자는 그러나 "어떤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유형의 갈등과 후폭풍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논란과 갈등이 예측되고도 남을 정도의 모호성과 미비점을 남겨둔 채 숙의 없이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LG헬로비전 비정규직지부, 전국금속노동조합 충남지부 현대제철 비정규직지회, 네이버 산하 자회사 노조, 삼성전자 협력사 이앤에스 노조 등이 각각 ▲하청구조 폐지 및 협력사의 자회사 전환 ▲비정규직 하청 근로자들에 대한 직접고용 ▲원청의 통상임금 문제 직접 해결 등을 요구하며 투쟁에 돌입하거나 예고한 가운데, 이 같은 기세가 산업계 전반으로 확산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산업계, 특히 중소·중견기업계에선 노란봉투법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라 어떻게든 사전에 법률·노무적 '대응 태세'를 갖추려는 움직임이 엿보인다.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 관계자는 "규모가 있는 회원사들은 자체적으로 노무사나 법률 자문을 두고 있다"며 "위험 회피를 위해 노란봉투법 관련 대응 매뉴얼 같은 걸 미리 준비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문제는 영세 기업들"이라며 "비용이 들더라도 최소한의 법률적 또는 노무적인 대비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덧붙였다.





최호경 기자 hocan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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