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재명 대통령만큼 좋은 조건에서 출발한, 게다가 운까지 따르는 대통령도 드물 것이다. 여소야대에 발목 잡혀 시달리던 윤석열 정부가 계엄이라는 오판으로 중도 하차하자 모든 것이 단숨에 뒤집혔다. 국회는 3분의 2 의석을 거머쥔 무소불위 집권 여당이 완전히 장악했다. '비명횡사' 공천 이후 민주당 내 비주류와 반대파는 이미 사라졌다. 대통령의 눈짓 하나, 말 한마디에 의원들은 앞다퉈 법안을 밀어붙이기 바쁘다. 당대표 표현처럼 그야말로 "일사불란(一絲不亂), 전광석화(電光石火)"다. 정부와 국회가 한 몸이 된 첫 정권, 그러나 위험한 "완전 동일체"다.
"계엄 및 내란 동조 세력"이란 올가미에 걸린 탓인지 국민의힘은 수적 열세를 넘어설 의지도 전략도 안 보이고, 국민 공감대 형성도 서툴다. 새로운 당대표를 뽑는 전당대회는 '컨벤션 효과'는커녕 있던 지지율마저 챙기지 못한다. 이뿐인가. 밀월(蜜月) 기간이라 불리는 취임 직후지만 정권 눈치 보는 언론과 방송이 늘고 있다. 말 많던 시민단체와 걸핏하면 거리로 뛰쳐나오던 노조도 잠잠하다. 경찰은 물론 윤석열 정권에서 그를 괴롭히던 검찰조차 재빨리 돌아섰다. 3대 특검은 인권 논란에도 아랑곳없이 전임 대통령과 부인을 겨냥해 실적 경쟁에 몰두한다. 마지막 보루였던 사법부마저 흔들려 균형의 추가 이미 기울었다. 세계 10위권 경제력, K팝 인기로 한껏 높아진 국가 이미지도 대통령에겐 불로소득이다.
국제무대의 조명도 쏟아진다. 80주년 광복절 행사를 주관했으며 한일·한미 정상회담도 앞두고 있다. 전임자의 이해할 수 없는 어설픈 계엄령은 결과적으로 이재명 시대의 문을 활짝 열었다. 불과 6개월 만의 상전벽해(桑田碧海), 천지개벽(天地開闢)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이 원래 이렇게 다이내믹하냐"며 복선을 깔고 묻는데 답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국내 정치 환경이 이처럼 꽃놀이패니,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이 없어 보인다. 권력 주변은 언제나 아부·아첨꾼들로 얼찐거리게 마련이다. 충성심으로 분장한 강경파가 주도권을 쥐고 전면에 나선다. 온건 합리파는 커튼 뒤로 숨는다. 정치생명, 어쩌면 그 이상을 걸지 않는 한 공개 비판이나 반대가 불가능한 분위기다. 그러나 그때가 역설적으로 가장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때다. 지도자는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닌지 항상 경계해야 한다.
현행 헌법은 대통령 권한이 너무 강해 "제왕적 대통령제"라 불린다. 문제는 이재명 정부가 제왕의 길로 치닫게 될 순간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대원칙인 3권분립이 유명무실 무력화되면 "견제와 균형"도, "법의 지배"도 사라진다. 오직 "법에 의한 통치"만 남는다. 역대 대통령들이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걸어간 불행과 비극의 길이다. 현명한 대통령이라면 이 전철(前轍)을 밟지 말아야 한다.
역대 정권은 뭔가 잘못되면 책임을 전임 정부에 돌렸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다르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아무 일도 못 한 전임자를 탓해 봐야 소용도 설득력도 없다. 감옥에 갇힌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자칫 역풍이 불 수도 있다.
세계 경제·무역 상황도, 한반도 정세도 심상치 않다. 문재인 정부는 낭만적 안보관으로 국제 사회에서 신뢰를 잃고 외톨이가 됐다. 냉혹한 국제 정치에서 기본을 놓쳤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 시대를 이끌 인재 확보, 전력(에너지) 수급도 비상이다. 초저출산·고령화 대책과 연금 개혁 또한 발등의 불이다. 야당 시절 상습적으로 남발했던 국수주의, 증오 유발 등 감정적 선동, 편 가르기, '내로남불' 행태를 하루빨리 거둬들여야 한다.
정치 환경이 전례 없이 좋은 지금이 개혁의 적기(適期)다. 그러나 개혁이 인적 청산으로 흐르면 정치 보복이 된다. 역대 정권이 명분으로 내세웠던 '적폐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는 참뜻은 묻히고 눈물과 원성만 쌓여 결국 정권 교체로 끝났다. 정적 제거엔 성공했을지 몰라도 여론과 민심은 싸늘해졌고, 개혁은 뒷걸음쳤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는 악순환을 가져올 뿐이다. 19세기 진보가 아닌 21세기 진보 정권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광복 80주년 경축사에서는 미래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80년"까지는 아니더라도 10년, 20년 앞을 내다보는 청사진조차 보지 못했다. 우리는 5년마다 대통령이 바뀌며 중장기 정책이 사라졌다. 미래를 잃어버린 나라가 됐다. 공무원들은 자리 보전에 급급했고, 그나마 기업인들의 분발로 여기까지 왔으나, 이제 그들도 정권 눈치를 심하게 본다. 반기업 정서를 걷어내고, 중장기 국가 비전을 세워 기업이 일하도록 해야 한다. 간섭 말고 지원만 하라! 그래야 나라가 산다. 그것이 진짜 개혁이고 진정한 진보다. '탈원전' 같은 비과학적·비합리적 정책은 나라를 망친다.
상생과 공존은 정치인 이재명이 대통령 되기 전부터 내세운 가치다.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언급했지만 특별사면으로 '스타일'을 구겼다. 언론의 도마에 오른 두 인사는 광복절과 어울리지 않는 정치적 사면으로, 국민 눈에는 '제 식구 챙기기'로 비쳤다. 조금만 신중했더라면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비판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는 대통령의 첫 번째 책무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이 피와 땀과 눈물로 일궈낸 성취이자 신성한 가치다. 그럼에도 이번 경축사에서 '자유'는 빠지고 민주주의만 거듭 언급한 것은 의외였다. 민주주의는 다의적이고 듣기 좋은 말이지만, 그 이름으로 전횡한 독재국가를 우리는 숱하게 보았다. 북한도 스스로를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부르지 않는가.
경축사에서 강조했듯 새 정부는 '신뢰' 정부가 돼야 한다. 대통령 말처럼 "신뢰는 행동으로 만들어진다". 그럴수록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진정성과 도덕성이 결여된 지도자는 어떤 행동을 해도 신뢰받지 못한다. 국민이 둘로 갈라져 지금처럼 증오의 불길을 키운 적이 있던가. 정치인의 책임이 너무나 크다. '포용' '화합' '통합'도 신뢰 위에서만 가능하다. 나라의 미래를 이끌 세대와 자녀를 올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도 지도자들은 모범을 보여야 한다. 대통령은 그 맨 앞에 서 있어야 한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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