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지는 여가부 개편, 이제 '존재 이유' 증명해야 [초동시각]

늦어지는 여가부 개편, 이제 '존재 이유' 증명해야 [초동시각] 원본보기 아이콘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1년 1월 여성가족부의 전신인 여성부를 신설하며 "남녀가 대등하게 일할 여건이 됐다"고 말했다. 여성의 권익과 발전을 위해 관련 정책을 통합·취급할 필요가 있다는 게 표면적 이유였으나, 김 전 대통령은 여성부가 남녀평등사회 구현을 위한 초석이 되길 희망했다.


전체 직원 수가 100여명에 불과한 초미니 부처로 시작했지만 이마저도 14년 만에 얻어낸 결과였다. '여성정책'이라는 공식 명칭을 써가며 관련 법률안을 제정하고 정책 입안에 나섰던 곳은 1988년의 정무장관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나서야 김 전 대통령은 여성부 신설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고 취임 4년째 부처를 만들고 초대 장관으로 여성을 임명했다.

우산도 없이 눈비 맞아가며 뛰어다닌 여성기업인은 일제 환영했다. 당시 '벤처 붐' 상황까지 더해 여성이 대한민국의 새 경제주체가 되는 데 기둥 역할도 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지금의 출산휴가 확대, 직장 내 고용·승진에서의 남녀차별 금지에 대한 기초 의식 확립 모두 당시 여성부가 내디딘 첫발의 결과물이다.


지금의 여가부가 부처 잔혹사 중심에 있는 모습을 보면 그래서 더 안타깝다. 장관 공백만 17개월째로 지난 정부에서 내내 존폐 위기에 놓였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갑질 의혹과 거짓 해명으로 첫 후보자가 자진 사퇴한 지는 열흘이 지났다. "국민 눈높이에 맞는 여가부 장관 후보자를 조속히 찾겠다"는 대통령실의 메시지 역시 이날이 마지막이다.


여가부는 차관 중심의 부처 운영, 실·국장들의 권한 확대로 업무 공백이 전혀 없다는 입장이지만 이들이 말하는 '유지'가 국민이 기대하는 여가부의 사명은 아니다. 장관 공백 사태가 길어질수록 정책 집행은 차질을 빚게 되고 폐지든 개편이든 변화의 시작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후보 시절, 여성이 받는 구조적 성차별을 인정하면서도 "여성만을 위해 정책을 하는 게 아니라 성평등을 추구해야 한다"며 남성들이 받는 '부분적 역차별'을 언급한 만큼 여가부는 사실상 새 부처 수준으로 개편될 듯하다. 그러기에 지금의 상황은 '방어 성공'이 아닌 위기에 가깝다. 여가부를 '성평등가족부'로 확대 개편하겠다는 대통령의 공약은 공백이 이어질수록 추진력을 잃고 여가부는 또다시 존재 이유를 의심받을 것이다.


강선우 사태로 이 정부가 도덕성에만 초점을 맞춰 후임을 물색할까도 우려스럽다. 수장 공백 장기화로 성평등 정책과 성범죄 대응 등 부처 고유 업무의 동력과 방향성을 잃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만큼 새 장관은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같은 시기에 낙마한 이진숙 교육부 장관 후보자를 국민이 믿지 못한 배경에는 논문 표절이나 가로채기 의혹보다 사교육비 대책 등 교육계 현안에 전혀 답하지 못했던 비전문성이 있었다.


새 부처가 개편 과정에서 '2030 남성 표심'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정치권 지도자들이 성평등을 왜곡·오해하며 청년 세대 젠더갈등을 정략적으로 써먹은 사례를 적지 않게 봐 왔다.


전 정부의 여가부 폐지 방향에 동의하는 바는 아니다. 그렇다고 여성부를 만든 김 전 대통령 역시 이 부처가 천년만년 존속하길 바라진 않았을 것이다. 개편 방향이 퇴색되지 않게 장관 후보자 후임을 서둘러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가부도 시대적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엑시트(exit)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은 드라마틱하게 체인지(change)해야 할 시점이다.





배경환 사회부 차장 khba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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