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대미 관세협상 시한을 이틀 앞두고 전격 방미했다. 재계에선 삼성 그룹 차원의 대미 투자·공장 신설·일자리 창출 계획을 담은 '패키지딜'이 협상 막판 히든카드로 거론되고 있다. 이는 다른 국가들과의 협상에서 투자와 고용에 강하게 반응해온 트럼프 행정부의 성향을 고려한 대응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의 인프라를 바탕으로 한 이 복안이 우리 정부에 협상 타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30일 재계에 따르면 전날 출국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워싱턴D.C. 현지에서 대미 협상 관련 핵심 제안 조율과 물밑 지원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당초 이달 말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열리는 글로벌 최고경영자(CEO) 행사 '구글 캠프'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일정을 바꾸고 미국 출장을 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의 협상 대응 여건이 긴박해진 상황에서, 이 회장이 지원 차원에서 움직였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 회장은 현지에 도착한 뒤 미국 내 사업 현황을 점검을 미뤄놓고 대미 협상 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제안들을 우선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 트럼프 행정부가 외국 기업의 미국 내 대규모 투자를 유도해온 점을 감안하면, 삼성의 투자 의향은 협상에서 실질적인 관심을 끌 수 있는 카드로 평가된다.
투자 규모는 현대자동차그룹이 지난 3월 발표한 61조원 수준에 근접하거나 이를 넘어설 가능성도 제기된다. 앞서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2030년까지 44억달러(약 6조4000억원)를 추가 투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기존 오스틴 공장 및 테일러 공장 건설에 투입된 금액까지 포함하면 총투자 규모는 54조원을 웃도는 수준이다. 이번 협상과 연계된 신규 투자안은 이보다 더 확대된 구상일 수 있다는 관측이 재계 안팎에서 나온다.
다만 실제 투자금액이 확정되기보다는, 일정 수준 이상의 투자 의향을 전달하는 방식이 될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실제 투자금액과 무관하게, 일정 수준의 투자 의향만으로도 협상에서 충분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유럽연합(EU)도 관세협상 과정에서 민간 중심의 6000억달러 규모 투자 의사를 표명했지만, 이는 구체적 계획이 아닌 '의향' 수준에 머무른 바 있다. 삼성 역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투자 의지를 전달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
일각에선 대미투자가 트럼프 행정부가 공들이고 있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맞춰 제시될 것으로도 내다보고 있다. 스타게이트는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을 인공지능(AI)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야심차게 내세운 AI인프라 구축 프로젝트지만, 최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좌초될 위기에 놓였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오픈AI(미국)와 소프트뱅크(일본) 등의 불화설도 제기된 상태다. 삼성전자의 협력이 절실한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삼성전자는 이미 지난 2월 이 스타게이트에 대한 투자를 제의받은 바 있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와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우리나라 서울에 있는 삼성전자 서초사옥을 직접 찾아 이 회장을 만나 스타게이트 협력, 투자 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삼성전자를 포함한 그룹 차원의 투자 의향도 함께 제시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삼성SDI는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요 확대에 대응해 미국 내 배터리 공장 추가 설립을 검토 중이다. 이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용 전력망 확충 수요와 맞물려 있으며, 미국 내 생산에 대해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요건을 충족하는 구조로 주목받고 있다. 삼성전기는 반도체 패키징용 기판, 세라믹 부품 등 고부가 전자소재의 현지화를 통해 첨단공정 공급망을 보완하는 투자 계획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SDS와 삼성리서치는 AI 반도체 활용을 기반으로 미국 내 공동연구소 설립과 디지털 물류 인프라 확대 등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총수가 직접 방문해서 그룹 차원의 물밑 제안을 한다면 공급망 완성과 고용 연계 효과를 뒷받침할 수 있는 협상 카드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더불어 삼성전자는 공장과 현지 법인의 설립 등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사회와의 연계사업에도 힘을 기울이겠단 방안도 내놓을 것으로도 보인다. 이를 통해 삼성전자 역시도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혜택을 받을 요건을 충족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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