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 증원에 반대해 병원을 떠났던 사직 전공의들이 뒤늦게나마 의료공백 사태에 대해 사과했다. 환자단체를 만나 "1년 5개월 이상 길어진 의정 갈등으로 불편을 겪은 국민 여러분께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수련 단축이나 입영 연기, 추가 전문의 시험 등 특혜성 조치는 전공의단체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도 밝혔다. 하지만 "조건 없이 자발적으로 복귀해 달라"는 요구엔 답하지 않았다. 형식적 발언이든, 면피성 사과든 중요하진 않다. 그간 국민들은 의사가 아픈 환자를 모른 척하고 떠났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꼈고, 의사집단의 이익을 위해 환자를 볼모로 삼았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정치적 수사나 집단의 이해관계는 다시 협상할 수 있지만, 꺼져가는 생명은 한번 잘못되면 다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의술은 더 이상 인술(仁術)이 아니며, 의사는 존경의 대상도 아닌 게 됐다.
수업에 복귀하기로 한 의대생들이 한마디 사과도 없는 점은 아쉽긴 하지만, 아직 학생 신분인 그들에게 반성을 강요할 수도 없다. 부디 편법이나 꼼수 없이, 다른 대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교육과정을 이수하길 바랄 뿐이다.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본인들 스스로가 주장했듯 의대 교육의 질은 국민 건강과 직결돼 있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가치다. 수업 시간을 늘리고, 방학 때도 쉬지 않고 학사일정을 맞추겠다니 분명 그들도 고생일 것이다. 대신 25학번을 '윤석열 세대'로 편 가르기 하거나 먼저 수업에 복귀했던 학생들을 '감귤'이라며 따돌리지 말아 달라. 적어도 그들은 더 좋은 의대에 가겠다고 재수를 선택하지도 않았고, 어쩌면 의대생의 본분을 다하려 했거나, 아니면 빨리 졸업해야 하는 나름의 사정들이 있었을 터다. 방대한 공부량에 치이더라도 시간이 허락한다면 앞으로 어떤 의사가 될지 고민해 달라. 지금의 의대생들이 졸업과 수련을 마치고 환자를 직접 마주할 때쯤엔 우리나라 의료환경이 또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모른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정 갈등의 가장 큰 문제는 불신"이라며 의료계와의 신뢰·협력 관계 복원을 가장 시급한 일로 꼽았다. 하지만 이 신뢰를 억지로 이어붙인다고 해서 다시 의정 갈등 이전으로 돌아가긴 힘들다. 정치에 휩쓸린 의료정책에 반발한 의료계의 분노, 의사들에 대한 국민의 불신, 의료교육과 수련 현장에서 끈끈하게 이어져 온 사제 간의 신의가 무너진 후유증은 그대로 남았다. 의대 2000명 증원이라는 근거 없는 정책으로 세계적으로 손꼽히던 대한민국의 의료시스템이 멈추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일방적 정책을 추진한 정권이 스스로 자멸하는 바람에 의대 증원도, 의대생 제적도 없던 일이 되고 사표를 낸 전공의들이 다시 돌아갈 길이 마련됐다.
문제는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제부터 정부와 의료계는 적정 의사 수 추계를 비롯한 산적한 의료개혁 과제를 놓고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할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재현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새 정부에서도 '지역의대 신설' '공공의료 사관학교 설립' 등 새로운 의사 증원 정책이 나올 것이고, 의사 수를 늘려 지역·필수·공공의료를 회복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는 국민들이 더 많을 것이다. 과연 그때 의사들은 어떤 대안을 제시할 것인가? 또다시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총대를 메고 여론의 뭇매를 맞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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