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한 점 없는 땡볕 아래 '끓는 밭고랑'…생계와 생존 사이[위기의 노동자]⑦

폭염에 오전 8시부터 찜통
작업 시작 5분 만에 땀범벅
때 놓치면 한 해 농사 망쳐

"수확엔 때가 있으니까. 이것만 마무리하고 쉬자고 했다가 결국 쓰러지는 경우가 많지."


29일 강원도 춘천 사북면의 한 고추밭. 새벽부터 30도를 넘긴 기온은 오전 8시가 채 되기도 전에 이글이글했다. 주변 산기슭에는 안개 대신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고, 고추밭엔 그늘 한 점 없었다.

본지 기자가 29일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의 한 밭에서 고추를 수확하고 있다. 최영찬 기자

본지 기자가 29일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의 한 밭에서 고추를 수확하고 있다. 최영찬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

고추 수확은 7월 중순부터 시작돼 8~9월까지 이어진다. 특히 여름철 고온 건조한 날씨는 병충해를 부르고, 조금만 시기를 놓쳐도 고추는 나무에서 썩거나 타버린다. '기온 35도 이상 야외작업 자제'라는 정부 지침은 이들에겐 사치처럼 들린다.


기자는 오전 8시부터 낮 12시까지 고추를 수확했다. 작업을 시작한 지 5분 만에 옷 안은 땀으로 가득 찼다. 바짝 마른 고추 이파리는 손만 스쳐도 부서졌고, 허리를 굽힐 때마다 이마에서 떨어진 땀이 줄줄 흘렀다. 가위질은 자꾸만 멈췄다. 눈에 들어간 소금기 섞인 땀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 수건을 여러 번 꺼내 닦아야 했다.


고춧대는 키 높이도 아닌 무릎 높이다. 평균 50~70㎝인데 수확하려면 허리를 직각 이상으로 꺾어야 한다. 이 자세를 유지한 채 한 고랑, 또 한 고랑을 기어가듯 이동해야 한다. 밭고랑은 오르내림이 심하고 비좁아 앉을 수도 없고 서 있기도 어렵다.

기자의 발끝 곧게 뻗은 고랑의 흙에서는 열이 수증기처럼 피어올랐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뜨거워진 땅은 마치 자신의 열기를 복수하듯 인간에게 퍼부었다. 바람조차 없었다. 공기는 정지한 듯 숨이 턱 막혔고, 허리를 굽힐수록 뜨거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땀은 그칠 줄 몰랐고 손에 쥔 가위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옷은 땀에 젖어 무게가 느껴졌고 다리는 서서히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29일 강원도 춘천의 한 고추밭의 온도가 35.5도까지 올랐다. 최영찬 기자

29일 강원도 춘천의 한 고추밭의 온도가 35.5도까지 올랐다. 최영찬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

오전 10시30분 수확 시작 2시간30분이 지났을 무렵 잠시 허리를 펴려 했지만 자세를 바꾸기조차 쉽지 않았다. 옷을 짜면 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현기증이 찾아왔다. 땅이 아찔하게 흔들리는 듯했고 어깨를 펴고 숨을 쉬기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서 함께 일하는 농민들은 묵묵히 고추를 따고 있었다.


밭에서 만난 이들 대부분은 70대 이상의 고령 농민이었다. 농민 이모씨(80)는 "아침 일찍 나와도 해가 머리 위로 올라가면 몸이 먼저 타들어 간다"며 "때를 놓치면 한 해 농사가 날아간다. 그러면 먹고살 길이 없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이씨는 잠시 앉았다가 다시 일어서려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매년 마을에선 농작물을 수확하다가 쓰러지는 사람이 나온다. 박정숙씨(83)는 "작년에도 그렇고 올해도 쓰러진 사람이 있었다"며 "다들 수확이 급하다 보니 쉬는 걸 미루다 자신도 모르게 의식을 잃는 것"이라고 전했다.


본지 기자가 29일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의 한 밭에서 고추를 수확하고 있다. 최영찬 기자

본지 기자가 29일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의 한 밭에서 고추를 수확하고 있다. 최영찬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

고추 수확 작업은 기계화가 어렵다. 손으로 일일이 잘라야 하고, 다 익은 것과 덜 익은 것을 구분해 따야 한다. 더구나 농촌 고령화는 상황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농가 인구 208만9000명 중 65세 이상 비율은 52.6%. 사실상 절반 이상이 노년층인 셈이다.


기후변화는 고추 농가에 이중고를 안기고 있다. 작년엔 폭염으로 고추가 익기도 전에 타버렸고, 올해는 폭우와 고온이 반복되며 병해가 퍼졌다. 이씨는 "고추가 햇볕에 익기도 전에 썩는 경우가 많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더 무서운 건 수확 작업 중 탈진하는 이가 생겨도 주변에서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는 점이다. 밭고랑은 시야가 가려지고 사람들끼리 거리가 멀어 누가 쓰러져 있어도 한참이 지나야 알아차린다. 농민들은 "그냥 조용히 주저앉아 있으면 다들 일하느라 못 보고 지나칠 수 있다"며 "나중에야 왜 안 보이지 하고 찾으면 그제야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본지 기자가 29일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의 한 밭에서 고추를 수확한 뒤 보관 통에 넣고 있다. 최영찬 기자

본지 기자가 29일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의 한 밭에서 고추를 수확한 뒤 보관 통에 넣고 있다. 최영찬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

오전 11시40분, 더는 자세를 유지할 수 없어 수확을 멈췄다. "그만하고 밥 먹자"라는 말이 들릴 무렵이었다. 손에 남은 건 온기만 남은 수건과 열기로 달궈진 가위뿐이었다. 4시간 동안 기자가 수확한 고추는 고작 10㎏ 남짓. 숙련된 농민들은 같은 시간에 20㎏ 가까이 딴다고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수확한 고추를 마을까지 옮겨야 했다. 지게차도 없고 경운기도 없었다. 모두 사람이 박스를 들고 걸었다. 한 박스의 무게는 15㎏ 안팎인데 기자는 반쯤 빈 박스를 들고도 무게에 중심을 잡지 못했다. 마을로 내려오자 찬물 샤워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열기는 식지 않았다. 머리는 맑아지지 않았고, 등은 여전히 축축했다.


한 해 농사는 땀의 결정체다. 고추 한 개, 그 붉은 열매 안에는 타는 듯한 더위와 끝나지 않는 노동의 무게가 배어 있었다. 기자는 결국 땀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주저앉았다. 햇빛은 여전히 따가웠고 고추밭엔 다시 이것만 따고 쉬자는 말이 울렸다. 그 말은 곧 오늘도 내일도 이어질 생존의 약속이었다.





변선진 기자 sj@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