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 부는 K컬처 바람에 유일하다시피 통풍을 앓는 곳이 북한이다. 드라마, 예능, 가요, 서적 등 남한의 모든 문물을 체제 위협으로 간주한다. 이를 소비한 주민에겐 가혹한 처벌을 내린다. K콘텐츠에 스민 자유분방함이 세뇌된 인민의 의식에 균열을 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역시 북한 콘텐츠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가상사설망(VPN)을 활용하면 북한의 주요 사이트를 접속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원칙적으론 그렇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북한 자료의 공개범위를 넓히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야권에선 반발이 거세다.
북한이 생산하는 모든 문화 콘텐츠는 선전도구다. 소설,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어린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동요조차 김씨 일가에 대한 찬양이 핵심 서사다. 1990년대만 해도 그런 동요를 들으며 가슴 뜨거워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북한의 선전을 그대로 받아들여 남한 사회에 전파하고, 남남갈등을 유발하며 사회적 혼란을 유도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거의 멸종 수준으로 줄어들었지만, 현재까지도 일부 남아있다. 남북은 1953년 이후로 전쟁을 잠시 멈춘 상황이다. 한국이 북한 콘텐츠를 막고 있는 배경이다.
그럼에도 달리 생각해볼 때라고 본다. 범위 확대를 넘어, 차제에 북한 콘텐츠에 대한 장벽을 아예 없애는 건 어떨까. 남북한 국력 차이는 물론이고 문화적 역량, 시민의식에서도 비교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한국 사회가 북한 콘텐츠에 무방비로 노출된다고 했을 때 동요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북한 체제를 흔드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
대북 콘텐츠 장벽이 무너졌을 때 모두가 이른 시일 내에 목격하게 될 것은, 한국 사회의 혼란과 동요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유머 감각'이라 본다. 고무 찬양 목적이 너무도 투명한 스토리텔링, 어색한 연출과 그 속에 담긴 배경화면 등을 보고 위협을 느낄 한국 사람은 없다. 되레 한국의 크리에이터들은 북한 콘텐츠를 밈(meme)으로 재생산하고 웃어넘길 것이다. '백두혈통'의 신화는 희화화되고, 체제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권력의 본질적 속성 중 한 가지는 '근엄함'이다. 진지하고 엄숙해야 한다. 해금돼 자유롭게 유통되는 북한 콘텐츠는 바로 그러한 북한 체제의 근엄함을 역설적으로 해체할 수 있다. 허무맹랑한 신화에 둘러싸인 절대권력을 벗겨내는 작업은 비웃음으로도 충분하다. 그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만든 콘텐츠 그 자체다.
마침 이재명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북한의 첫 공식 반응이 어제 나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동생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28일 담화에서 "우리는 서울에서 어떤 정책이 수립되고 어떤 제안이 나오든 흥미가 없다"며 "한국과 마주 앉을 일도, 논의할 문제도 없다"고 단언했다. 북한의 '한국 패싱'은 상수이고, 한국은 그저 묵묵히 제 할 일을 찾아 하는 수밖에 없다.
북한 콘텐츠를 개방하는 것이 북한 정권의 돈줄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주도해 만든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은 북한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료를 대신 걷는 업무를 한다. 경문협이 북한에 주려고 법원에 공탁해둔 금액이 30억원을 넘겼다고 한다. 북한 콘텐츠 자유화는 공탁금 규모를 빠르게 키울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고 본다. 김정은 체제는 30억원+α를 얻겠지만, 앙상하게나마 남아있던 체제의 권위는 흔적도 없이 빼앗기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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