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이라 믿고 구독한 건데"…가전렌탈 '사업철수'에 소비자 어쩌나

A사 사업철수 서비스 중단
강제해지에 일부는 손배소송 검토중
분쟁해결 법적기반 아직 미흡
환불·교환 등 대응절차 불명확
냉장고 등 품목별 기준 없어
부품유지기간도 잘 안 지켜져
책임·권리 등 새로운 기준 필요

LG전자와 삼성전자 등 대기업을 중심으로 가전제품 '렌탈' 시장이 '구독' 형태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법적 기반은 여전히 미비한 실정이다. 특히 장기 렌탈을 통해 가전제품을 이용하는 소비자들을 보호할 법적 장치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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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가전업계에 따르면 대기업 계열 A사는 음식물처리기 렌탈 서비스와 관련해 고객들과 잇단 마찰을 빚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0월 주방가전 사업에서 철수한 A사는 이후 해당 제품의 부품 생산도 중단했고, 장기 렌탈 고객들에게 고장 수리 등 애프터서비스(AS)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무상 AS를 제공하겠다'는 광고를 믿고 렌탈을 선택한 소비자들은 예고 없이 서비스 중단 통보를 받았고, 일부는 일방적인 '강제 해지' 조치를 당했다며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일부 고객은 단체 손해배상 소송 가능성까지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일반 구매의 경우 환불이나 교환, 위약금 처리 등 대응 절차가 비교적 명확하지만, 렌탈 계약은 기준이 모호해 기업도 대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특히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렌탈 상황을 다룬 세부 조항이 부족해 사태가 더 복잡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장기 렌탈 위험에 노출된 소비자들

A사의 사례는 사업 철수라는 특수한 사정에서 비롯됐지만, 본질적으로는 렌탈 소비자들이 애초부터 법적 보호 장치 없이 분쟁에 노출돼 있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지적된다.

현재 소비자분쟁이 발생할 경우, 기업들은 국민권익위원회가 고시하고 한국소비자원이 공시한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을 참고해 처리한다. 그러나 이 기준은 대부분 제품을 '직접 구매'한 경우를 전제로 세부 기준이 마련돼 있고, '렌탈'은 '장기물품대여서비스업' 항목에 일반적인 분쟁 해결 방안만 열거돼 있어 현실 적용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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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정수기나 안마기처럼 한정된 품목만 예시돼 있을 뿐, 냉장고·세탁기 등 주요 가전제품에 대해선 품목별 기준이 없다. 이는 자동차 등 다른 고가 렌탈 품목과 비교해도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가전제품의 경우 고장이 일상생활에 직접적인 지장을 주기 때문에, 일반 렌탈 기준으로 일괄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배향미 법무법인 신원 변호사는 "렌탈 서비스는 소비자가 기업의 존속 리스크까지 부담하는 구조"라며 "일회성 구매보다 피해 가능성이 더 높은데도 안전장치는 취약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진채현 법무법인 대한중앙 변호사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면 애매한 피해를 본 소비자들이 불성실한 기업에 의해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며 "세밀하고 적용 가능한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접는 사업' 늘면서 부품 보존도 사각지대

렌탈 관련 분쟁은 최근 인공지능(AI) 기능을 탑재한 'AI가전' 시대가 열리면서 더욱 늘어나고 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새로운 기능을 앞세운 신제품 출시가 활발해진 만큼, 사업을 중도에 접는 경우도 함께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사업 철수 이후 해당 제품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면, 이를 장기 렌탈한 소비자들은 수리조차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현행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는 사업 철수와 같은 특수 상황에도 가전제품의 경우 품목별로 5~8년간 부품을 보유하도록 명시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기업이 이를 철저히 이행하지 않고 있으며, 규제당국 역시 품질보증 기간(1~2년)만 부품을 확보한 경우 별도 조치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게 현장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업계는 이 같은 제도 미비가 향후 더 큰 문제로 번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LG전자와 삼성전자가 최근 본격화한 가전 구독사업의 경우, 아직 제품 사용 기간이 5년을 넘지 않아 수리 수요가 본격화되지 않았지만, 향후 제품 고장이 현실화되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LG전자는 2022년부터, 삼성전자는 지난해 12월부터 대형가전 중심의 구독사업을 시작했다. 구독은 명목상 새로운 서비스지만, 실질적으로는 렌탈의 확장형으로 볼 수 있어 동일한 법적 공백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홍석현 법무법인 주원 변호사는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신유형의 서비스인 만큼, 사업자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소비자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형민 기자 khm19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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