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을 펑펑 틀어도 전기 요금은 0원이라면. 영국에서는 이제 현실이 됐습니다. 2015년 설립 후 10년 만에 영국 1위 배전 업체로 떠오른 옥토퍼스 에너지가 개발한 '제로 빌(Zero bill·무료 요금)' 집 덕분입니다.
제로 빌 집은 가정용 태양광 패널과 에너지 저장장치, 옥토퍼스의 AI 전력 관리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건설사가 집을 짓고 나면, 옥토퍼스 직원들이 직접 주택을 제로 빌 규격으로 개조합니다.
제로 빌 집은 영국에서 지난 3월 첫 공개 됐고, 현재 약 130채가 가동 중입니다. 옥토퍼스는 오는 2030년까지 영국에 10만채의 제로 빌 집을 공급할 계획입니다. 독일, 뉴질랜드 등 해외로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지요.
제로 빌 집은 거주자에게 최소 10년간 무료 전기를 보장합니다. 그렇다고 옥토퍼스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택에 설치된 태양광패널, 에너지 저장장치, AI 배전망을 최적화해 전기 낭비를 0(제로)으로 줄이고 남는 전력으로 차익을 챙깁니다.
사실 가정용 태양광 패널로 전기 요금을 줄이는 건 국내에서도 가능합니다. 가정에 1~3킬로와트(kW) 이상의 '미니 태양광 모듈'을 설치하면, 발전량에 따라 한국전력에서 전기 요금을 차감해 주지요. 옥토퍼스의 제로 빌 집도 비슷한 방식이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영국은 전체 전기 생산의 약 52%(2023년)가 풍력, 태양광 발전인 나라입니다. 즉 바람이 많이 불거나 햇살이 강할 땐 전기 생산량이 늘어 요금이 저렴해지고, 그 반대일 땐 비싸집니다. 제로 빌 집에 설치된 에너지 저장장치는 전기 요금이 저렴할 때 에너지를 축적했다가 비싸지면 다시 전력망으로 돌려보내 차익을 얻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전기 요금을 0으로 맞추는 겁니다. 이 모든 복잡한 전력망 운영은 전부 옥토퍼스의 AI가 관리합니다.
제로 빌 집을 관리하는 옥토퍼스의 AI 시스템 이름은 '크라켄'이라고 합니다. 사실 크라켄은 고객들의 전기 요금 관리 시스템과 고객센터 운영을 자동화한 자체 소프트웨어(SW)에서 시작했습니다. 옥토퍼스가 성장하면서 크라켄은 수백만 가정집의 전력 수요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학습된 AI는 전력망 관리에 투입됐습니다.
옥토퍼스는 미래 AI 기술 개발에도 적극적입니다. 옥토퍼스가 설립한 '넷 제로 센터(Centre for Net Zero)'에선 '패러데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크라켄이 훈련할 다양한 전력 수요·공급 가상 시나리오를 생성하는 것이지요.
훈련을 마친 크라켄은 더욱 전력망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고, 에너지 공급이 너무 많다거나 부족해지는 돌발 상황에도 대처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앞서 2017년 구글의 AI 자회사 '딥마인드'도 영국 전력망 관리 기업인 '내셔널 그리드'와 협력해 전기 수요·공급을 최적화하는 AI를 개발하고자 했지만, 3년의 시행착오 끝에 프로젝트를 폐기한 바 있습니다.
옥토퍼스에 따르면, 올해 초 크라켄은 전 세계 7000만가구의 전력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우수한 기술력 덕분에 EDF 에너지 미국 지사, 도쿄 가스, 내셔널 그리드 북미 지사 등 경쟁 에너지 기업들까지 구입해 사용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영국 언론은 옥토퍼스가 크라켄의 가치를 100억파운드(약 18조6000억원)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앞으로 1년 안에 크라켄을 분할해 독립 자회사로 출범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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