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한국 문화예술계는 '토니상'이라는 값진 성과를 새롭게 추가했다.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미국 공연계 최고 권위의 토니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주요 6개 부문을 휩쓸었다. 특히 이 작품이 SK그룹 산하 비영리 재단인 우란문화재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탄생했다는 점에서,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 새롭게 조명받는 계기가 됐다.
이는 어쩌면 해피엔딩뿐만 아니라 2015년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우승, 영화 '기생충'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등 지난 10년간 한국 문화예술계가 이룬 빛나는 성취 다수가 기업의 후원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도 하다. 기업의 지속적인 후원이야말로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K콘텐츠의 든든한 배경이 된 셈이다.
우란문화재단은 최태원 SK 회장의 모친이자 워커힐미술관 설립자인 박계희 여사의 호(號) '우란'을 따 설립된 재단이다. 2014년 설립된 재단의 첫 창작지원 작품이 바로 어쩌면 해피엔딩이었다. 우란문화재단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이 작품은 초연 당시부터 한국어와 영어 버전을 동시에 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우란문화재단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며 박천휴, 윌 애런슨 콤비에게 창작을 제안하고 제작을 주도했던 라이브러리컴퍼니 김유철 본부장은 "영어 버전 공연을 동시에 제작한 사례는 거의 없을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이 이뤄졌다"며 "당시 우란문화재단은 다양한 도전이 가능한 실험의 장이었다. SK그룹이 큰일을 해낸 것"이라고 전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도 기업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교보생명 그룹 산하 공익재단인 대산문화재단의 번역 지원 사업이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대산문화재단은 국내 대기업 산하 재단 중 유일한 문학 전문 재단으로, 1992년 설립된 후 이듬해부터 한국 문학의 번역 사업을 시작했다. 정부가 1996년 한국문학번역원의 전신인 한국문학번역금고를 설립하기 이전의 일이었다.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향한 민간 주도의 첫걸음이었다.
대산문화재단은 2014년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어판 출판을 지원했고, 이는 2016년 한강이 영국 부커상을 받는 데 이어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토대가 됐다. 노벨문학상 수상 직전 기준으로, 한강의 작품은 해외에서 총 82건 번역·출판됐으며 이 가운데 72건이 부커상 수상 이후의 성과였다. 수상 이후 작품 번역이 급증하면서 한강의 이름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고, 결국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한강의 수상은 교보생명 창립자인 고(故) 신용호 회장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이정화 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은 "교보생명 신용호 창립자님의 제안으로 1992년 교보문고에 노벨상 수상자들의 초상화를 입구에 걸었다"며 "선대 회장은 한국 문학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길 염원했다"고 설명했다.
금호문화재단은 '금호영재콘서트'와 '금호영아티스트콘서트'를 통해 국내 클래식 음악계의 신예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왔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금호 영재 출신은 곧 실력 있는 젊은 연주자를 뜻하는 수식어가 됐다. 금호영재콘서트는 만 15세 이하 음악 영재들을 위한 무대이고, 금호영아티스트콘서트는 만 16세에서 26세 사이 젊은 음악가들을 위한 공연이다.
1998년 7월 첫 무대의 주인공은 피아니스트 손열음이었으며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조성진은 2005년 11세 때 금호영재콘서트를 통해 데뷔했다.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 우승으로 주목받은 피아니스트 임윤찬 역시 2015년 같은 나이에 이 무대를 통해 첫선을 보였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지난해 11월20~20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창단 75주년 기념 투어 기자간담회에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허영한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금호문화재단은 2000년 소규모 클래식 전용 공연장 '금호아트홀'을 개관해 젊은 연주자들에게 풍부한 무대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뛰어난 연주자들에게 장학금과 항공권을 지원하고 명품 고악기를 무상 임대하는 '금호악기은행'을 운영한다. 이곳에는 과다니니(Guadagnini) 바이올린 8점과 마치니(Maggini) 첼로 1점이 소장돼 있다.
금호문화재단은 이 외에도 젊은 음악가들의 계약서 감수, 국제 콩쿠르 수상 관련 보도자료 배포 등 행정적·홍보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받은 기생충의 뒤에는 CJ그룹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CJ는 1995년 스티븐 스필버그·제프리 카첸버그·데이비드 게펀이 공동 설립한 드림웍스에 3억달러를 투자하며 영화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드림웍스 지분 11%를 확보했고, 1997년 CJ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며 영화 배급에 진출, 1999년에는 CJ CGV를 설립해 극장 사업까지 확장했다.
이후 '살인의 추억(2003)' '마더(2009)' '설국열차(2013)' 등에 투자하며 봉준호 감독과의 인연을 지속했고, 마침내 기생충으로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해외 시장 개척에도 적극 나서며 한국 영화의 세계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중요한 성과들이 이어지면서 향후 기업들의 문화예술 후원 활동도 늘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온다. 윤소영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 기업들의 문화예술 후원 활동이 아직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 문화예술 활동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기업도 늘고 있다"며 "최근의 문화예술계 성과들이 기업의 후원 활동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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