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침입 방어한 조선 초기 돌성, 사적 된다

세종 연간 건립된 '서천읍성' 지정 예고
조선 초기 축성정책 변천 보여주는 자료

금강 하구를 통해 충청 내륙을 침입하던 왜구를 가로막은 돌성이 사적이 된다.


서천읍성 항공사진[사진=국가유산청 제공]

서천읍성 항공사진[사진=국가유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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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청은 조선 세종 연간에 건립된 '서천읍성(舒川邑城)'을 사적으로 지정할 계획이라고 17일 밝혔다. 한 달간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 여부를 확정할 방침이다.

서천읍성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지방행정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해안 요충지에 축조한 읍성이다. 연해읍성으로는 드물게 자연지세를 활용해 산지에 축성했다. 돌로 1645m 길이의 둘레를 쌓았다.


그 형태는 조선 초기 축성정책의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받는다. 세종 20년(1438) 반포된 '축성신도(築城新圖·조선 초기 성을 쌓을 때의 기준)'의 계단식 내벽과 이보흠이 세종 25년(1443) 건의한 한양도성의 '수직 내벽' 축조기법이 모두 확인되기 때문이다.


서천읍성 치성[사진=국가유산청 제공]

서천읍성 치성[사진=국가유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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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읍성은 다른 읍성에서 찾기 어려운 독특한 양식도 갖췄다. 대표적 예가 치성(雉城·성 밑에 접근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벽에 돌출해 쌓은 시설) 간 간격이다. '충청도읍지' 등 문헌에 따르면 이곳에는 치성이 열일곱 곳 있었다. 현재는 열여섯 곳만 남았는데 각각의 간격이 약 90m다. 세종 15년(1433)에 150보 간격(155m)으로 만들도록 한 기준보다 더 촘촘하다.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후대에 조성됐다고 추정되는 혜자(垓字·적의 침입을 방어하려고 성 밖을 둘러 판 연못), 방어용으로 보이는 1.5~2m 간격의 수혈유구(竪穴遺構·딸에 세로로 판 구덩이 형태의 흔적) 등도 있어 조선 초기 연해읍성의 축성 구조와 변화 과정을 모두 살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축성신도'에 따른 계단식 내벽[사진=국가유산청 제공]

'축성신도'에 따른 계단식 내벽[사진=국가유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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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온전한 상태는 아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읍성 훼철령(1910)'으로 성 내부의 공해시설(행정, 군사 등 공무수행에 필요한 시설) 대부분이 훼손됐다. 하지만 남문지 주변 등을 제외한 성벽 대부분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 길이는 1535.5m로, 기존 둘레의 93.3%로 추정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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