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 방식으로 재건축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여의도 아파트 단지들 사이에서 신탁사와 주택 소유주 간 갈등이 번지고 있다. 집 소유주들은 신탁사의 전문성을 믿고 사업을 맡겼는데, 의견 반영도 제대로 하지 않고 설계안을 변경했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전문가들은 신탁사에 주어진 권한을 견제할 제도적 장치가 없어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16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여의도 일대에서 신탁 방식을 추진하고 있는 공작아파트에 이어, 광장아파트에서도 정비계획 변경안을 두고 소유주들이 들고 일어섰다.
사업을 맡은 한국자산신탁은 최근 광장아파트(28번지)를 단지를 최고 56층 5개 동, 1391가구로 재건축하는 내용의 정비계획 변경안을 냈다. 이를 두고 소유주들은 한국자산신탁이 소유주 의견 수렴 없이 일방적으로 정비계획 입안 절차를 밟았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소유주들은 사업 후 가구 수가 너무 많이 증가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정비계획안에 따르면, 가구 수는 기존 576가구에서 1391가구로 2.4배 늘어난다. 광장아파트 소유주 A씨는 "계획안대로 가구 수가 늘어날 경우 일일 활동 인구가 일반 주거 단지의 2~3배 많아지게 된다"며 "거주 인구 증가에 따른 차량 통행량도 2.8배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단지 내 극심한 교통 체증이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가구 수를 늘리면서 소형 평형을 과도하게 배치했다는 점도 논란이다. 변경안에 따르면 국민주택 규모(전용 84㎡ 이하) 평형이 전체의 67.8%를 차지한다. 고급 재건축을 기대했던 일부 소유주 사이에서는 광장아파트가 소형 평형 위주의 '벌집 아파트'가 되는 게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소유주들은 기존 92% 수준이던 전용률이 67%까지 떨어뜨리면서 공급한 면적 대비 주민이 거주하는 공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확 줄어든 것도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라 보고 있다.
한국자산신탁은 "강화된 소방 기준 등을 충족하고 필요 공용 시설물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전용률이 낮아진 것"이라며 "두 차례에 걸쳐 주민 평형수요 조사를 실시했고, 정비사업위원회를 통해 의견을 수렴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통합심의 과정에서 설계 조정 가능성도 열려 있다"고 밝혔다.
신탁사가 주민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신탁사가 영등포구청에 제출한 정비계획안에는 '소유주 희망 평형 수요조사' 결과가 함께 첨부됐다. 이에 대해 소유주들은 전체 가구의 52%가 응답한 조사 결과에 불과해 전반적인 주민의 의견이 수렴됐다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인근에 위치한 공작아파트도 신탁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하다 최근 신탁사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공작아파트 일부 소유주들은 비상대책위원회 격인 '공작아파트 정상화 추진위원회'(공정추)를 결성하고, 지난 7일부터 3일간 KB금융지주 본사 앞에서 "KB부동산신탁을 규탄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공정추는 KB부동산신탁이 소유주 전체 동의 없이 소형 평형 가구 수를 확대하고, 59㎡를 한 동에 한 라인으로 전층 배치하는 방식으로 설계를 변경했다며 반발했다. 당초 시공사인 대우건설이 입찰 당시 제시한 설계안은 25평(전용 59㎡)이 63가구, 41평 이상 대형 평형이 191가구였다. 그러나 KB부동산신탁은 59㎡를 141가구로 늘리고, 대형은 124가구로 축소했다.
이와 관련해 일부 주민 항의하자 다시 59㎡ 가구 수를 124가구로 줄인 3차 설계안을 제시했다. 현재 공작아파트 일부 소유주들은 정비사업 운영위원회 해임안건을 제출한 상태다. 오는 26일에는 통합심의 안건과 관련해 전체회의를 열기로 했다.
신탁사를 둘러싼 내홍이 확산하자 정비업계에서는 다시 조합방식으로 선회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신탁 방식은 초기 자금 조달과 빠른 사업 추진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위의 사례처럼 의견 충돌 시 소유주 의사 반영이 어렵다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여의도 대교아파트는 2017년 KB부동산신탁을 예비시행자로 선정했다. 그러나 신탁사가 시행자 지정 요건에 맞추지 못하면서 2023년 조합 방식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목동신시가지 7단지 재건축준비위원회도 2023년 코람코자산신탁과 업무협약(MOU)을 맺었으나 지난 2월 투표를 통해 조합 방식을 변경했다.
수수료 갈등도 신탁 방식을 꺼리는 이유다. 통상 신탁사는 정비사업장의 총 매출 중 2~4%를 수수료로 챙긴다. 사업장에 따라 신탁보수액의 상한선을 설정해두는 곳도 있다. 그러나 모호한 수수료 규정 탓에 갈등이 발생한다. 광장아파트의 경우 한국자산신탁에 전체 매출의 2%를 수수료로 지급하되 신탁보수 상한선은 240억원으로 제한을 뒀다. 그러나 계약서 별첨에는 '경제 사정의 급변'이나 '현저한 노력'이 발생할 경우 협의를 통해 보수를 변경하거나 별도 지급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다. 이 단지 집주인들은 신탁사의 추가 수익 확보가 가능한 구조로 보고 있다.
전문가는 신탁사가 과도한 권한을 가진 반면 이를 견제할 장치는 미비하다고 지적한다. 신탁방식을 택한 정비사업장은 운영위원회를 구성해 소유주 의견을 반영할 수 있지만, 이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 명시된 법적 기구가 아니어서 실질적인 구속력이 없다. 일단 신탁사와 계약이 체결되면 해지도 쉽지 않다. 계약을 철회하려면 소유주 70%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김제경 투미부동산컨설팅 소장은 "신탁방식은 신속성과 전문성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소유주의 의사 결정권은 제약받기 쉬운 구조"라며 "신탁사가 일방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이를 제도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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