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이 지주사인 롯데지주 의 자사주를 놓고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대부분 계열사가 업황 부진으로 실적이 악화되며 롯데지주 자사주를 매각해 유동성 확보에 나섰는데, 주주 권리를 대폭 강화한 개정된 상법이 본격 시행되면서 제동이 걸릴 공산이 커졌다. 여기에 정치권에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담긴 더욱 강력한 상법 개정안이 추진되며 '진퇴양난'에 빠진 모습이다.
21일 재계에 따르면 이달 초 국회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이 지난 15일 공표됐다. 개정된 상법은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명시 ▲상장회사 사외이사를 독립이사로 변경 ▲감사위원 선출 시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 의결권 3%로 제한 ▲대규모 상장회사 전자주주총회 도입 의무화 등이 주요 골자다.
개정 상법은 유예기간을 거쳐 공포 1년 뒤 시행하지만,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조항(382조3 제1항)은 지난 15일 공포 즉시 시행됐다. 앞으로 이사회가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릴 경우 소액주주들이 이 조항을 근거로 소송에 나설 수 있다. 롯데지주 이사회의 추가 자사주 매각 결의가 부담스러운 이유다.
앞서 롯데지주는 지난달 30일 보유 중인 자사주 5%를 롯데물산에 처분했다. 1476억원 상당 규모다. 롯데지주는 2017년 지주사 전환 과정에서 32%에 달하는 자사주를 취득했다. 롯데지주는 지난 3월 제출한 사업보고서에서 '자기 주식보고서'를 통해 '재무구조 개선과 신규 사업 투자'를 목적으로 발행주식 총수의 약 15% 정도 자사주 매각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힌 내용을 일부 이행한 것이다.
하지만 주식시장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최근 논평을 통해 "(롯데물산에 자사주를 매각하는 안건을 승인한) 롯데지주 이사회 결의는 이사 충실의무를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개정 상법 위반 가능성이 높다"며 "자기주식을 매입하면 회계기준상 자본 차감이 이뤄지는 것이 글로벌 스탠더드지만 국내에서는 자사주를 자산으로 잘못 인식해 우호 세력이나 관계사에 매각해 의결권을 부활시킨다"고 지적했다.
다만 롯데지주 관계자는 "2017년 일반지주회사로 출범하는 과정에서 당시 롯데제과를 중심으로 롯데쇼핑 · 롯데칠성 음료·롯데푸드 등 계열사들과 분할·합병 과정을 거치면서 자사주 비중이 높아졌다"면서 "롯데물산에 자사주 일부를 매각하기 전에도 총수 일가의 보유 지분율과 지배구조가 안정적인 상황이어서 일반 주주의 권익을 침해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롯데지주는 재계에서 자사주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날 기준 롯데지주 자사주 비중은 27.37%로, 50대 그룹 핵심 계열사 중 자사주 보유 비중이 태영그룹 지주사 티와이홀딩스 (29.8%) 다음으로 높다. 유통 업계에서는 이마트 의 자사주 비중이 2.93%, 신세계 9.1%, 현대백화점 3.42% 등으로 대부분 10% 미만이다.
정치권에선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특정 기업이 10% 이상 자사주를 보유한 경우 예외 없이 이를 소각하거나, 5%를 초과해 보유한 상장사는 소각 기한을 지정하는 방안 등이 추진 중이다.
더불어민주당 코스피5000특별위원회 소속 김남근 의원은 지난 9일 자사주 취득 이후 1년 이내에 처분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개정안은 임직원 보상 등 예외적으로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 한해 자사주 보유를 허용하되, 정기 주주총회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또 지난 14일에는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이 자사주 취득 이후 6개월 내 소각을 의무화하는 상법 개정안을 냈고, 16일에는 김현정 민주당 의원이 자사주 소각 기한을 3년으로 설정하는 법안을 제출하는 등 관련 발의가 줄을 잇고 있다. 재계에서는 정부 여당의 입법 의지가 큰 사안인 만큼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이를 처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제기된다.
정치권에서는 자사주가 오너 일가의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활용되거나 차익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의 매물로 전락하는 사례가 적지 않고, 이 때문에 일반 주주들의 권익이 침해된다는 점을 근거로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추진하고 있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해당 기업의 주식 수가 줄어 주당순이익(EPS)이 증가하고, 기존 주주의 지분율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어 배당과 유사한 주주환원을 유도할 수 있다고 본다.
실제 롯데지주는 올해 2월 주식시장에서 주당 2만원 아래로 떨어졌는데, 지난 대선을 거치면서 상법 개정에 따른 자사주 소각 기대감으로 이달 초 3만6000원까지 급등했다.
다만, 이런 주가 상승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장남인 신유열 미래성장실장(부사장)이 롯데지주 지분을 확보하는데 부담이다. 경영권 승계를 준비 중인 신 부사장은 지난해에만 총 세 차례(6월, 9월, 12월)에 걸쳐 롯데지주 주식 총 1만6416주를 매입했다. 지난달 4일 9507주를 추가로 사들여 현 지분율은 0.02%(2만5923주)다.
롯데지주 측은 지난해 11월 발표한 기업가치 제고 계획에 따라 내년까지 주주환원율 35% 이상을 지향하면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 법안이 구체화되면 이행 방안을 추가로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롯데지주 관계자는 "재무 건전성이 높아지고 사업 체력도 강화되면 궁극적으로 주주가치 제고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현금 배당과 자기주식 소각을 병행해 주주환원율 35% 이상을 지향하는 등 주주환원 정책을 성실히 이행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 16일부터 이틀간 열린 '2025 하반기 롯데 VCM(Value Creation Meeting·옛 사장단 회의)'에서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업무에 임해달라"면서 각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에게 강력한 쇄신을 주문했다. 롯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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