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대성당'에서 화자인 나는 아내가 초대한 시각장애인 방문객이 탐탁지 않았다. 멀리서 온 그와 어색한 저녁을 먹고 놀다 아내는 먼저 잠들었고, 단둘이 깨어있는 거실의 TV에서는 종교 이야기와 함께 대성당 장면이 나왔다. 그가 대성당은 어떻게 생겼는지 물었지만 나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어마어마하고, 돌로 만들었고, 대리석도 들어갔고, 옛날에 대성당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었던 거고…."(김연수 번역, 문학동네)
듣고 있던 그가 대성당을 그려볼 것을 제안했고, 나는 쇼핑백에 볼펜으로 대성당을 그린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손 위에 그가 손을 얹고 내가 그리는 선을 따라간다. 그렇게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대성당을 따라 그리는데 그가 그 모습을 손으로 느끼며 멋지다고 한다. 그림이 완성돼 갈 무렵 그가 나에게 눈을 감고 그려보라고 한다. 나는 눈을 감고 그림을 마저 그렸다. 그림을 다 그린 뒤로도 나는 눈을 뜨지 않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림을 바라본다. 지금껏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대성당의 모습을 감은 눈으로 보며 '이거 대단하다'며 감탄한다. 대성당을 제대로 본 건 그것이 처음이었다.
음악이나 그림처럼 인간의 감정과 신체를 거쳐서 나온 비언어적 표현들은 그 자체를 보여주거나 들려주는 것이 가장 정확한 경험을 전달하는 것인데, 그럴 수 없을 때나 다른 필요에 따라서 우리는 언어로 그것을 묘사해야 한다. 이럴 때 소리의 높낮이나 강약, 악기의 질감, 그림의 구성이나 형태에 대한 묘사 만으로서의 언어는 그 효과가 미흡할 수밖에 없다. 말은 음악이나 이미지 그 자체보다 그것으로 인한 우리의 감각이나 감정과 연결된 묘사에 의해 더 멀리 더 깊이 도달할 수 있다. 그 자체의 형태가 아니라 외연이나 윤곽을 말함으로써 중심이나 실체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종종 실체와 사실은 파악하기 어려운 본질 보다 주변의 관계와 그림자로 더 잘 드러난다.
언어는 듣는 이의 경험이나 감각에 대한 기억 회로와 연결되어 의식과 상상 속에서 세계를 재창조한다. 듣는 사람의 감정은 말한 사람의 감정과는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각기 다르게 드러나는 감정 속에서 남다른 감동을 보기도 한다.
소설 속의 내가 그린 그림은 그의 손을 통해 전달된 또다른 신체 언어였고, 그것은 그의 내면에 도달해 거대한 대성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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