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경와인셀라]로마인이 사랑한 술…2000년 전 잿더미 '폼페이' 복원

<28> 이탈리아 '마스트로베라르디노(Mastroberardino)'

1878년 아트리팔다 설립 伊캄파니아 대표 와이너리
피아노 디 아벨리노…화산토서 자라난 순수함
토착 '알리아니코'로 빚은 '타우라지'…남부 최고의 숙성력 자랑

편집자주하늘 아래 같은 와인은 없습니다. 매년 같은 땅에서 자란 포도를 이용해 같은 방식으로 양조하고 숙성하더라도 매번 다른 결과물과 마주하게 됩니다. 와인은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우연의 술'입니다. 단 한 번의 강렬한 기억만 남긴 채 말없이 사라지는 와인은 하나같이 흥미로운 사연을 품고 있습니다. '아경와인셀라'는 저마다 다른 사정에 따라 빚어지고 익어가는 와인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내 들려 드립니다.

'마스트로베라르디노(Mastroberardino)' 와인셀라의 천장 벽화.

'마스트로베라르디노(Mastroberardino)' 와인셀라의 천장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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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와인은 '캄파니아 펠릭스(Campania Felix)', 즉 '비옥한 땅'이라고 부르던 곳에서 왔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인들이 건너와 신도시 '네아폴리스(Neapolis)'를 건설한 이 지역은 오늘날까지 '캄파니아(Campania)'라는 이름을 품고 이탈리아 남부의 중심지로 거듭났고, 네아폴리스는 캄파니아주(州)의 최대 도시 '나폴리(Napoli)'로 성장했다.


나폴리가 남부 이탈리아 최대 도시로 성장하며 발전하는 동안 '베수비오(Vesuvio)산'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반대편 도시는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채 2000년을 로마에 멈춰 있었다.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며 화산재와 함께 시간이 멈춰버린 곳, '폼페이(Pompei)'다.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매우 번성했던 고대 도시 폼페이는 와인 생산과 이를 통한 상업도 활발히 이뤄지던 도시였다. 하지만 화산 폭발로 단 하루 만에 잿더미가 되어 오랜 시간 역사에서 소멸한 도시가 됐다.

폼페이(Pompei)에서 발굴된 와인 바.

폼페이(Pompei)에서 발굴된 와인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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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이탈리아 정부는 시간이 멈춘 폼페이에서 과거 로마인들이 아끼던 와인 복원에 나섰다. '신비의 별장'이란 뜻의 '빌라 데이 미스테리(Villa dei Misteri)'는 화산 폭발 전 이 지역의 포도밭과 포도 품종, 재배 기술 및 와인 양조 방법을 재현하는 프로젝트였다. 복원팀은 포도나무 뿌리에 남아있는 토양의 흔적과 화산재에서 발견한 포도 씨의 DNA 조사를 통해 당시 와인이 고대 품종인 '피에디로쏘(Piedirosso)'와 '시아스시노소(Sciascinoso)'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후 2000년 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포도를 재배하고 양조해 2003년 '빌라 데이 미스테리 2001' 와인을 출시했다. 이 와인은 대부분 경매를 통해 판매됐고, 수익금은 폼페이를 비롯한 캄파니아주의 와인 산지를 위한 연구자금으로 사용됐다.

고대 와인 되살린 '포도 고고학자'

고대 이탈리아 와인의 비밀을 풀어낸 빌라 데이 미스테리 프로젝트는 '마스트로베라르디노(Mastroberardino)'라는 와이너리의 역할이 컸다. 마스트로베라르디노 가문은 캄파니아 지역에서 수 세기에 걸쳐 와인 생산에 종사한 가문이다. 현대적 형태의 와이너리 역사는 이탈리아 왕국의 기사였던 안젤로 마스트로베라르디노(Angelo Mastroberardino)가 아벨리노 상공회의소에 와이너리 설립을 공식 등록한 1878년 시작됐다.


이후 안젤로의 아들 미켈레(Michele)는 로마에 세운 물류회사를 중심으로 와인 수출에 집중했고, 그의 아들 안토니오(Antonio)는 '수많은 고대 품종을 되살리며 포도 고고학자'로 이름을 떨쳤고, 폼페이 프로젝트를 이끌기도 했다.


(왼쪽부터)마스트로베라르디노의 설립자인 안젤로 마스트로베라르디노(Angelo Mastroberardino)와 그의 아들 미켈레 마스트로베라르디노(Michele Mastroberardino).

(왼쪽부터)마스트로베라르디노의 설립자인 안젤로 마스트로베라르디노(Angelo Mastroberardino)와 그의 아들 미켈레 마스트로베라르디노(Michele Mastroberard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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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피에로 마스트로베라르디노(Piero Mastroberardino)가 아버지 안토니오의 뒤를 이어 와이너리를 이끌고 있다. 피에로는 1996년 대표직을 맡은 이후 포도밭을 확장해 현재 260헥타르(ha)를 운영하고 있고, 현대적 생산 설비 투자와 연간 200만병 이상 생산, 50개국 수출이라는 성과를 이뤘다.

그는 2015년부터 이탈리아 프리미엄 와인 연합체인 '그란디 마르키(Istituto Grandi Marchi)'의 회장을 맡고 있다. 2004년 설립된 그란디 마르키는 '안티노리(Antinori)', '마시(Masi)', '테누타 산 귀도(Tenuta San Guido)', '돈나푸가타(Donnafugata)', '미켈레 키아를로(Michele Chiarlo)' 등 이탈리아의 명망 있는 와인 가문이 참여한 생산자 협회다. 올해 5월에는 이탈리아 경제와 산업에 지대한 공헌을 한 25인의 기업인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노동 기사 작위인 '카발리에레 델 라보로(Cavaliere del Lavoro)'를 아버지에 이어 수상하기도 했다.


마스트로베라르디노의 현 소유주, 피에로 마스트로베라르디노(Piero Mastroberardino).

마스트로베라르디노의 현 소유주, 피에로 마스트로베라르디노(Piero Mastroberard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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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이 빚어낸 고귀함…'피아노' 그리고 '그레코'

캄파니아주는 덥고 건조한 여름과 온화한 겨울을 지니고 있어 포도의 생장 기간이 길고, 화산성 토양 덕분에 필록세라 등 병충해 예방에도 탁월하다. 지중해 연안의 산들바람이 티레니아(Tyrrhenian)해와 아펜니노(Apennino) 산맥을 가로지르며 불어와 열기를 식혀줘 포도의 산도를 촉진시키는 데도 도움을 준다. 특히 내륙의 이르피니아(Irpinia) 지역은 해발 400~700m의 고지대에 위치해 일교차가 크고, 이는 포도의 산도와 아로마 복합성을 높이는 핵심 요소가 된다.


이르피니아는 캄파니아 동쪽 내륙 아벨리노(Avellino) 지방의 와인 산지로, 캄파니아의 3대 'DOCG(Denominazione di Origine Controllata Garantita·보증된 원산지 통제 명칭)'가 몰려있는 지역이다. DOCG란 이탈리아 정부가 보증한 우수한 원산지에서 생산되는 와인에 부여되는 등급으로, 허가되는 포도 품종과 재배 및 양조 방식 등에 관해 까다로운 규정이 적용된다. 마스트로베라르디노 역시 아벨리노 지방의 중심부인 아트리팔다(Atripalda) 마을에 첫 번째 와이너리를 설립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마스트로베라르디노의 대표 청포도 품종 '피아노(Fiano)'.

마스트로베라르디노의 대표 청포도 품종 '피아노(F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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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캄파니아는 마스트로베라르디노가 DOC(Denominazione di Origine Controllata) 와인 생산량의 절반 이상, '타우라시 DOCG(Taurasi DOCG)' 와인의 90% 이상을 담당할 정도로 마스트로베라르디노에 의존하던 생산지였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며 포도밭 관리와 수확 방법, 양조 기술의 현대화와 집중 투자 등으로 와인의 품질이 향상되며 지역 와인 산업이 전반적인 성장을 이뤄냈고, 현재는 이 지역 와이너리가 100곳 이상으로 확대됐다.


캄파니아에선 레드와 화이트 와인이 모두 생산되는데, 이 가운데 화이트 와인은 특히 '피아노 디 아벨리노 DOCG(Fiano di Avellino DOCG)'와 '그레코 디 투포 DOCG(Greco di Tufo DOCG)'가 뛰어나다. 각각 '피아노(Fiano)'와 '그레코(Greco)' 품종으로 만드는 두 DOCG 와인은 언덕이 많은 지형 덕분에 서늘한 기후의 높은 고도에서 포도가 재배돼 뛰어난 산미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마스트로베라르디노의 '피아노 디 아벨리노 DOCG(Fiano di Avellino DOCG)' 포도밭 전경.

마스트로베라르디노의 '피아노 디 아벨리노 DOCG(Fiano di Avellino DOCG)' 포도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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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피아노 디 아벨리노는 타우라지 지역 서쪽의 아벨리노 마을 주변의 높은 언덕에서 생산되는 화이트 와인이다. 피아노는 전통적으로 당도가 매우 높게 올라가는 품종이기 때문에 알코올 발효 과정에서 온도 조절이 어려웠다. 이로 인해 와인은 탄산가스를 함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지금과 같은 드라이 타입으로 처음 만든 것이 마스트로베라르디노다. 품종의 현대화를 주도한 셈이다. 피아노 디 아벨리노는 화산성 토양 덕분에 미네랄 캐릭터가 풍부하며 견과류 향과 잘 익은 과일 맛이 특징이다.


'라디치 피아노 디 아벨리노 DOCG(Radici Fiano di Avellino DOCG)'는 마스트로베라르디노의 포도밭 가운데 피아노 품종에 가장 적합한 떼루아를 연구한 끝에 선정한 싱글 빈야드 '산토 스테파노 델 솔레(Santo Stefano del Sole)'에서 생산한 피아노 100% 와인이다. 피아노 품종을 현재 캄파니아의 고귀한 화이트 와인으로 인정받게 만든 주역으로 꼽히며, 오크 숙성 없이 피아노 품종의 순수함이 특징으로 뛰어난 산도감과 부드러운 질감을 느낄 수 있는 바디감이 좋은 와인이다. 10~20년 이상의 긴 숙성 능력도 자랑한다.


그레코 디 투포는 피아노 디 아벨리노 바로 위에 있는 작은 DOCG로 사과껍질 향과 화산 응회암 덕분에 역시 광물향이 깊은 화이트 와인을 생산한다. '마스트로베라르디노 그레코 디 투포 DOCG(Mastroberardino Greco di Tufo DOCG)'는 그레코 품종의 전형성을 보여주는 신선하고 좋은 구조감의 와인이다. 투포 마을의 점토-석회암, 화산암 토양은 와인에 미네랄리티를 부여해 노란 과일, 미네랄, 아몬드 향이 느껴지며 신선하고 좋은 구조감으로 다양한 음식과 조화를 이루는 와인이다.


'라디치 피아노 디 아벨리노 DOCG(Radici Fiano di Avellino DOCG)'

'라디치 피아노 디 아벨리노 DOCG(Radici Fiano di Avellino DO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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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 남부 토착 품종의 자부심 '타우라지'

피아노와 그레코 모두 캄파니아 와인의 높은 품질을 보여주는 품종이지만 캄파니아의 얼굴이자 최고급 품종으로 꼽히는 것은 결국 토착 적포도 품종인 '알리아니코(Aglianico)'다. 알리아니코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가장 유명한 레드 와인 DOCG 중 하나인 타우라지의 기본을 구성하는 적포도다. 흙빛에 가까운 색을 띠며, 환상적인 씁쓸한 맛의 초콜릿, 가죽, 타르 등의 아로마와 풍미가 있다. 또한 이탈리아 남부에서 가장 긴 숙성력을 가진 와인의 바탕이 되는 품종이다.


최고급 알리아니코가 생산되는 타우라지는 마스트로베라르디노의 심장과 같은 곳으로,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해외로 수출되는 타우라지 와인은 마스트로베라르디노가 유일했다. 알리아니코는 높은 고도에서도 잘 자라는 품종으로, 타우라지의 포도밭은 보통 300~400m 이상의 고도에 위치한다. 최근 한국을 찾은 피에로 마스트로베라르디노는 "마스트로베라르디노의 타우라지 포도밭은 해발 고도 700m의 높은 고도로 인해 다른 포도밭보다 더 긴 숙성기간을 가져갈 수 있다"며 "기후변화로 수확시기가 전반적으로 당겨지고 있는 최근에도 여전히 11월에 수확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로 인해 타닌이 많고 구조감이 좋아 장기 숙성 능력이 뛰어나다"고 강조했다.


마스트로베라르디노의 대표 적포도 품종 '알리아니코(Aglianico)'

마스트로베라르디노의 대표 적포도 품종 '알리아니코(Aglian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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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G 규정에 따라 타우라지는 알리아니코를 85% 이상 사용해야 하며 법적 최저 알코올 도수는 12도(%)다. 최소 36개월 이상 숙성시켜야 하며, 이 중 12개월은 오크통에서 숙성시켜야 한다. 타우라지 리제르바의 경우 최저 알코올 도수는 12.5%로 더 높고, 최소 숙성 기간도 48개월로 더 길며, 이 기간 중 18개월은 오크통에서 숙성해야 한다.


캄파니아 지역의 다른 와이너리들이 국제 품종으로 눈을 돌릴 때, 마스트로베라르디노는 토착 품종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열정을 이어왔고, 그 정점에 있는 와인이 '마스트로베라르디노 라디치 타우라지 DOCG 리제르바(Mastroberardino Radici Taurasi DOCG Riserva)'다. '라디치(Radici)'는 '뿌리'를 뜻하는데, 캄파니아의 뿌리인 알리아니코 품종의 수호와 부흥을 향한 마스트로베라르디노의 깊은 열정을 상징한다.


라디치 타우라지 리베르바는 석회질이 포함된 점토 토양의 '몬테마라노(Montemarano)' 포도밭 중에서도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구획에서 엄선한 알리아니코 100%로 만들어졌다. 와인은 가넷 빛이 감도는 어두운 루비 색상을 띠며, 레드 체리 등 붉은 과일, 블랙 페퍼, 발사믹, 말린 허브와 감초, 가죽, 스모크 향이 인상적이다. 최상의 복합미와 함께 긴 여운과 숙성 잠재력을 지닌 타우라지와 마스트로베라르디노의 아이콘 와인이다.


아이콘 와인 '마스트로베라르디노 라디치 타우라지 DOCG 리제르바(Mastroberardino Radici Taurasi DOCG Riserva)'.

아이콘 와인 '마스트로베라르디노 라디치 타우라지 DOCG 리제르바(Mastroberardino Radici Taurasi DOCG Riser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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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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